소설가 최일남은 서울대 국문과 2학년 때인 1953년 문학잡지에 소설 ‘쑥 이야기’를 발표했고 3년 뒤 ‘현대문학’에 소설 ‘파양’을 발표해 일찍이 등단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최일남은 대학 2학년때 벌써 조선일보에 입사시험을 쳤다. 1차시험에 합격한 최일남은 의논차 출판사 하는 선배를 찾아갔다가 발목이 잡혀 백영사 편집장을 3년쯤 했다. 대학 졸업 이듬해인 1958년 고향 전주 출신 한 선배의 권유로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김원전이 운영하던 ‘세계일보’ 문화부장이 됐다.

여당지 세계일보는 4·19 전후해 ‘민국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천관우 편집국장을 모시고 조세형, 남재희, 서동구, 김중배 등 쟁쟁한 젊은이들을 모아 새 출발해 언론계에 바람을 일으켰다.

최일남 부장이 만드는 민국일보 문화면은 외부기고로 대충 채우는 관행을 벗고 직접 취재한 문화기사를 실어 1954년 창간한 신생 한국일보와 좋은 경쟁관계를 만들었다.

최일남은 경향신문을 거쳐 1963년 동아일보 문화부장으로 옮겼다. 신문사에서 문화부장으로만 22년을 보낸 그는 1980년 8월9일 해직됐다. 기구하게도 최일남은 취재차 해외 출장을 갔다가 멕시코 현지에서 전화로 자신의 해직을 통보 받았다.

최일남은 1980년 7월 초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행 배를 탔다. 그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광주사태를 정점으로 나라 모양이 폭풍전야의 음산한 ‘반도’를 뒤로 했다. 이런 판국에 남의 나라에 깔려 있는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는 엉뚱한 여유가 내심 미안했다. 오래 전부터 예정된 기획취재여서 회사의 출장 명령에 따라 나섰다.”

최일남은 멕시코 현지를 취재하면서 출장기간 한 달을 보낸 뒤 8월 어느날 서울의 편집국장과 어렵사리 통화했다. 당시만 해도 국제전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최일남은 1987년에 쓴 칼럼집 ‘상황과 희망’에서 담담하게 “한 시간이 걸려 통화가 됐다. 편집국장에게 ‘너도 해직기자 명단에 들어 있다’는 대답을 얻는데 성공했다”고 썼다.

전화를 끊고 최일남은 본인의 뜻이 아닌데도 ‘일신상 사정으로 사직코자 하오니’라며 사표를 썼다. 그는 언젠가 “1980년 여름 신문기자 대량해직 조치는 ‘정신적 학살’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해직기간 최일남은 벼리듯 소설쓰기에 몰두했다. 그는 해직기간에 소설 ‘고향에 갔더란다’와 ‘거룩한 응달’, ‘서울의 초상’을 쏟아내면서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현실 비판을 전면에 드러냈다. 글은 한결 날카로워졌고 사회비판적 메시지도 담았지만 특유의 해학적 문체와 낙관은 잃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해고자가 된 최일남은 동아일보 해직 동료들이 만든 ‘8.9 동우회’에 가입했다. 퇴직금에다 빚까지 내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설한 동료를 축하하러 갔지만 얼마 뒤 그 동료는 두 손을 털털 털고 물러났다. 우후죽순처럼 도시의 모퉁이마다 생겼던 생맥주집 장사를 시작하거나, 추어탕집을 인수하고, 출판사를 차리고, 레코드 가게를 시작한 동료도 있었다.

최일남은 다행히도 1984년 4년만에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복직해 해직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38년전 황망했던 타의에 의한 사직서 작성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하물며 38년 전 해직이 영원한 해직이 됐던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해직명단에 언론사주들은 신군부의 강요보다 곱절이나 더 많은 숫자를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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