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성쇠와 인재의 득실은 오직 과거(科擧)의 공정함에 달려 있습니다. 기사년(숙종15 1689년)이래 사적 인연으로 등용되는 길이 크게 열려서 권세가의 친척과 부귀한 집안의 글자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했으므로, 미리 출제(出題)를 알려 차술(借述)하게 했다는 비판이 자자합니다. 갑술년의 경화(更化: 갑술환국) 때에도 옛 습속을 그대로 답습하여 갈수록 더욱 오염되었기 때문에, 수년 사이에 대과나 소과의 과거시험장이 이 짐승들의 족적이 낭자한 진창과 같았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이번 초시(初試)에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과거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짐승으로까지 비난한 예조참의 박권이 숙종 25년 3월 11일에 숙종에게 올린 소장(疏狀)에서 한 말이다. 박권은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을 때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했을 때나 똑같은 과거 부정이 반복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과거에서도 구체적인 상피(相避)의 법을 만들 것을 국왕 숙종에게 청했다.

조선왕조의 통일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상피(相避)의 법이 있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상피조(相避條)에 보면, ‘관원은 자기의 사촌, 사위, 손녀사위, 자형과 매부, 외가의 사촌, 처가로는 처부, 처조부 및 처남, 동서 모두 상피한다’라고 매우 구체적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인사권을 가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경우에는 더욱 철저했다. 권력의 집중에서 일어날 필연적인 부정 부패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거의 경우 그리 철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권의 상소로도 그해 가을에 치러진 증광문과에서의 대대적인 부정을 막지 못했다.

▲ 조선왕조의 통일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상피(相避)의 법이 있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상피조(相避條)에 보면, ‘관원은 자기의 사촌, 사위, 손녀사위, 자형과 매부, 외가의 사촌, 처가로는 처부, 처조부 및 처남, 동서 모두 상피한다’라고 매우 구체적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사진=신채용 역사학자 제공
▲ 조선왕조의 통일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상피(相避)의 법이 있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상피조(相避條)에 보면, ‘관원은 자기의 사촌, 사위, 손녀사위, 자형과 매부, 외가의 사촌, 처가로는 처부, 처조부 및 처남, 동서 모두 상피한다’라고 매우 구체적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사진=신채용 역사학자 제공
숙종 25년(1699)의 증광시(增廣試)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 경사를 기념해 치러진 것이었지만, 어떡해서든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은 이를 노려 대대적인 부정을 일으켰다. 바로 이때 부정을 저지른 대표적인 인물이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이자 효종의 부마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의 동생인 심익창(沈益昌)이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그가 왜 과거부정을 저질렀을까.

국왕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도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와 외당숙 김석주(金錫胄)의 지원으로 조선후기에 가장 막강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즉위와 동시에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서인을 내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고, 6년 뒤 성인이 된 그 해에는 남인을 몰아내고 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맡기면서 남인의 영수들을 과감히 제거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집권세력의 교체와 함께 각 붕당의 영수를 제거하면서 왕권 확립에 정점을 찍었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가던 숙종에게는 왕실의 친인척들이 때로는 도움도 되지만 왕실이라는 이유로 갖은 청탁과 부정을 저지르고 각각의 붕당의 후원자가 되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숙종의 정국 운영에서 소외된 왕실 인사가 바로 심익창이었다. 그의 형 심익현이 효종의 부마로서 숙종의 고모부였고,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음직(陰職)으로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지만 내심 당당히 문과 급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당하지 못한 그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응시했던 과거 자체를 원천 무효가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것도 다행히 사형을 면한 것일 만큼 숙종의 처벌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사면을 반대해온 노론 일파의 제거를 꿈꾸게 된다. 그의 조력자는 처이종사촌 아우로 매우 친하게 지냈던 김일경(金一鏡)이었다.

김일경은 능력이 매우 출중했다. 장원급제 후 요직을 거치면서 45세의 나이로 세자(경종)의 스승이 됐다. 허나 그가 가진 가문의 배경은 이렇다 할 것이 없어서 권력의 중심이 되긴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양살이하던 이종사촌 매형 심익창과 의기투합한다. 둘은 앞으로 왕이 될 세자의 측근 내시로 키울 고자어린이 박상검을 키우면서 교육시켰고, 결국 박상검은 세자의 총애를 받는 내시로 만들었다. 경종 즉위 후 이들은 궁궐 안팎에서 경종을 위시해 자신들의 반대 세력인 노론을 숙청하는 사화를 일으켰다. 그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다. 이 사화로 노론계 인사 백여 명이 화를 당하는 살육이 발생했다. 하지만 영조의 즉위와 함께 김일경은 사화의 주모자로 참형 당했고, 심익창은 국문을 받기 전 죽었다. 정당하지 못한 과거 부정과 그 처벌의 반감에서 시작된 증오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면서 정국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죄과의 부담이었을 것이다.

▲ 대학 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투명가방끈)이 2014년 11월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 대학 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투명가방끈)이 2014년 11월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현직 여고의 교무부장이었던 교사가 자신의 딸들을 자신의 학교에 입학시킨 것 자체도 떳떳하지 못한 처사다. 하물며 시험지를 검토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자녀를 명문대를 입학시키면 그것으로 자식교육은 끝이란 말인가. 무능한 국가로만 보는 조선왕조도 상피법 있었고, 혐의(嫌疑) 받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겼다. 우리 시대엔 염치가 없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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