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통일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상피(相避)의 법이 있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상피조(相避條)에 보면, ‘관원은 자기의 사촌, 사위, 손녀사위, 자형과 매부, 외가의 사촌, 처가로는 처부, 처조부 및 처남, 동서 모두 상피한다’라고 매우 구체적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인사권을 가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경우에는 더욱 철저했다. 권력의 집중에서 일어날 필연적인 부정 부패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거의 경우 그리 철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권의 상소로도 그해 가을에 치러진 증광문과에서의 대대적인 부정을 막지 못했다.
국왕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도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와 외당숙 김석주(金錫胄)의 지원으로 조선후기에 가장 막강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즉위와 동시에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서인을 내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고, 6년 뒤 성인이 된 그 해에는 남인을 몰아내고 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맡기면서 남인의 영수들을 과감히 제거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집권세력의 교체와 함께 각 붕당의 영수를 제거하면서 왕권 확립에 정점을 찍었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가던 숙종에게는 왕실의 친인척들이 때로는 도움도 되지만 왕실이라는 이유로 갖은 청탁과 부정을 저지르고 각각의 붕당의 후원자가 되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숙종의 정국 운영에서 소외된 왕실 인사가 바로 심익창이었다. 그의 형 심익현이 효종의 부마로서 숙종의 고모부였고,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음직(陰職)으로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지만 내심 당당히 문과 급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당하지 못한 그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응시했던 과거 자체를 원천 무효가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것도 다행히 사형을 면한 것일 만큼 숙종의 처벌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사면을 반대해온 노론 일파의 제거를 꿈꾸게 된다. 그의 조력자는 처이종사촌 아우로 매우 친하게 지냈던 김일경(金一鏡)이었다.
김일경은 능력이 매우 출중했다. 장원급제 후 요직을 거치면서 45세의 나이로 세자(경종)의 스승이 됐다. 허나 그가 가진 가문의 배경은 이렇다 할 것이 없어서 권력의 중심이 되긴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양살이하던 이종사촌 매형 심익창과 의기투합한다. 둘은 앞으로 왕이 될 세자의 측근 내시로 키울 고자어린이 박상검을 키우면서 교육시켰고, 결국 박상검은 세자의 총애를 받는 내시로 만들었다. 경종 즉위 후 이들은 궁궐 안팎에서 경종을 위시해 자신들의 반대 세력인 노론을 숙청하는 사화를 일으켰다. 그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다. 이 사화로 노론계 인사 백여 명이 화를 당하는 살육이 발생했다. 하지만 영조의 즉위와 함께 김일경은 사화의 주모자로 참형 당했고, 심익창은 국문을 받기 전 죽었다. 정당하지 못한 과거 부정과 그 처벌의 반감에서 시작된 증오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면서 정국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죄과의 부담이었을 것이다.
현직 여고의 교무부장이었던 교사가 자신의 딸들을 자신의 학교에 입학시킨 것 자체도 떳떳하지 못한 처사다. 하물며 시험지를 검토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자녀를 명문대를 입학시키면 그것으로 자식교육은 끝이란 말인가. 무능한 국가로만 보는 조선왕조도 상피법 있었고, 혐의(嫌疑) 받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겼다. 우리 시대엔 염치가 없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