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남녀’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화유기’ 스태프가 추락 사고로 큰 부상을 당했을 때, ‘킹덤’,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는 이럴 때만 터져 나왔다. 누군가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치거나.

가끔 스태프들은 먼저 제보 전화를 걸어왔다. “이러다 누구 하나 죽어요”, “일주일에 130시간 일하는 게 말이 되나요?”, “식탁에 앉아 밥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려 해도 그들은 연락을 끊었다. 대화 도중 혹시라도 신원이 도출되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 지난해 4월25일 ‘tvN 혼술남녀 고 이한빛PD 사망대책위’가 CJ E&M 앞에서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해 4월25일 ‘tvN 혼술남녀 고 이한빛PD 사망대책위’가 CJ E&M 앞에서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그들의 밥벌이를 책임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사 한 줄로 그들의 근로 여건이 당장 바뀔 수 없다는 건 스태프들도, 나도,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보를 부탁하며 쫓아다니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미안함을 핑계로 늘 제자리에서 종종거렸고, 그 사이 과노동으로 인한 스태프들의 사건 사고는 이어졌다. 사건이 발생하면 스태프들과 방송사, 제작사의 주장은 엇갈렸고, 제한된 정보 속에서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답답함과 궁금증. 드라마 제작 현장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느껴보자고 결심한 이유였다. 체험 기간은 단 3일. 스태프들의 고충을 이해하기엔 터무니없는 기간이지만, 이 짧은 기간에도 분명 보이는 것은 있었다.

방송사들이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내놓은 제작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1일 15시간 초과 촬영 금지’, ‘15시간 초과시 익일 휴식 보장’이었다. 하루 20시간, 30시간 연이어 촬영했다는 제보가 수두룩했던 터라, ‘15시간’이라는 숫자가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이것만 지켜져도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이 혁신적으로 나아지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15시간 노동을 몸으로 겪자, “이걸 지금 개선책이라고 내놓은 거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3일간 내 노동 시간은 매일 15~16시간 정도였다. 아침 8시 집합 시간을 맞추기 위해 5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고, 12시 30분 촬영이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2시가 넘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집합을 위해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15시간 초과 노동 금지가 철저히 지켜진다 한들 하루 4시간의 취침시간 확보도 쉽지 않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근로 시간 단축은 그저 ‘52시간 이상 일 시키지 마!’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드라마 PD는 “요즘 장시간 촬영이 문제 되니 위에서는 무조건 빨리 찍으라고만 닦달한다”고 토로했다. PD들이 빨리만 찍으면 주 120시간 찍어 만들던 드라마를 52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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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 기간을 늘리고, 촬영 기간을 더 확보하고, 촬영 회차를 늘리는 데는 돈이 필요하고, 방송 편성 시간을 줄이고, 주 2회 편성되는 드라마 제작 관행을 주 1회로 줄이는 덴 ‘합의’가 필요하다. 방송 제작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시간 단축만 강요하는 건 현재 현장 스태프들에게 쏠려있던 압력의 무게를 다른 쪽으로 잠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현장에서 만난, 취재 도중 만난 여러 스태프들은 방송가의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듯 감내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 하나로, 스태프들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고, ‘버티다 보면 나아져’라는 희망 고문을 견디고 있었다.

▲ 김윤정 오마이스타 기자
▲ 김윤정 오마이스타 기자
이렇게 드라마가 성공해도 그 성공의 열매는 배우, 작가, 감독에게 돌아가고 스태프들은 1년 차는 1년만큼, 10년 차는 10년만큼의 피로를 안고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누군가에겐 일상의 안식처인 드라마를 위해 누군가는 죽을 만큼 힘든 노동을 견뎌야 하는 아이러니. 이 모순된 고리를 끊으려면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노동 인권도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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