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 불공정한 관행을 폭로한 뒤 세상을 떠난 고 박환성 PD의 유작이 나왔다. 제목은 ‘엘리펀트보이(Elephant Boy)’. 지난 13일 개막한 10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출품해 15일과 19일 두 차례 상영한다.

그는 고 김광일 PD와 EBS 다큐프라임 ‘야수와 방주’편을 찍으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가 지난해 7월 중순 세상을 떠났다. 박 PD의 동생 박경준씨는 형이 운영하던 제작사 블루라이노픽쳐스를 이어받았다. 박씨는 지난 15일 경기도 일산에서 열린 ‘엘리펀트보이’ GV에서 “형의 유작을 완성하고 EBS와 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제작사 대표를 승계했다”고 말했다.

박씨가 정리해야 할 유작은 두 편이다. 박 PD가 지난해 남아공에 찍으러 간 ‘야수와 방주’편은 앞으로 편집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 다큐영화제에 출품한 ‘엘리펀트보이’는 네팔 남부 치트완에 사는 크리스라는 소년과 코끼리 조련사인 그의 아빠 끄리쉬나를 중심으로 인간과 코끼리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지난 2012년 EBS 다큐프라임 ‘소년과 코끼리’(연출 박환성, 촬영 박환성·서종백)의 후속편으로 볼 수 있다.

[관련기사 : 고 박환성 PD가 보여준 인간의 동물착취]

▲ 매년 12월 네팔에서 열리는 코끼리 축제에서 코끼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축구하는 모습. 사진=엘리펀트보이 갈무리
▲ 매년 12월 네팔에서 열리는 코끼리 축제에서 코끼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축구하는 모습. 사진=엘리펀트보이 갈무리

‘소년과 코끼리’는 치트완 국립공원 코끼리 사육센터에서 조련사들이 두 살 무렵의 코끼리를 훈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끼 코끼리를 어미와 분리해 쇠사슬로 기둥에 묶어놓고, 말을 듣지 않으면 도끼로 코끼리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 매년 12월 열리는 축제에서 코끼리 축구를 준비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를 바라보는 소년 크리스는 코끼리를 때리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이 작품은 지난 2011년부터 박 PD가 촬영해 만든 작품이다. 5년 뒤인 2016년 박 PD는 사춘기로 성장한 크리스를 찾아 인간과 코끼리를 다시 담았다. 촬영을 끝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동료 제작진과 박씨는 최대한 박 PD의 의도를 헤아리며 ‘엘리펀트보이’를 만들었다. 후반작업 전반의 프로듀서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만든 진모영 감독이 맡았고, 내레이션은 그룹 국카스텐의 하현우씨가 담당했다.

이번 작품에 참여한 현진식 편집자 겸 음악감독은 지난 15일 GV에서 “‘소년과 코끼리’는 사람에 집중해 코끼리를 대상화한 면이 있지만 박 PD가 이번에 촬영해놓은 영상을 보면 코끼리에 초점을 뒀다는 의도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러닝타임 52분 중 절반 이상 배경음악을 깔았는데 관객이 코끼리에 감정이입을 하도록 편집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소년과 코끼리’와 비교할 때 인상 깊은 장면은 코끼리센터에 야생 수컷이 나타났을 때다. 코끼리센터에는 길들이기 쉬운 암컷과 새끼 코끼리만 있다. 수컷 코끼리는 가족이 그리워 종종 코끼리센터를 찾는다. 크리스의 아버지 끄리쉬나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수컷 코끼리를 쫓아낸다. 안전상의 이유와 수컷이 사료를 먹어 치우니까. 엘리펀트보이에는 울부짖는 수컷 코끼리와 겁에 질린 암컷·새끼코끼리를 리얼하게 담았다.

지난 2015년 지진 이후 네팔은 관광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끼리 축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이다. 코끼리와 장기간 신뢰를 쌓아가는 조련 방식으로는 늘어가는 관광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 힌두교 국가인 네팔에서 코끼리는 한때 영물(靈物)이었지만 야생의 영역까지 자본의 논리가 깊이 침투한 이후 코끼리는 고급 유희물로 전락했다.

▲ 코끼리 조련사인 끄리쉬나(왼쪽)가 조련사 일을 그만두고 정글에 코끼리를 돌보는 일을 하러 떠나기 전 가족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다. 아들 크리스는 아버지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진=엘리펀트보이 갈무리
▲ 코끼리 조련사인 끄리쉬나(왼쪽)가 조련사 일을 그만두고 정글에 코끼리를 돌보는 일을 하러 떠나기 전 가족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다. 아들 크리스는 아버지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진=엘리펀트보이 갈무리

작품에는 수컷 코끼리의 슬픔만 보이진 않는다. 네팔에서도 가난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따루족’만이 코끼리 조련사가 된다. 코끼리 조련사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코끼리를 가혹하게 훈련시켜 재계약에 성공해야 하는 불안한 지위와 생활고는 소년 크리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끄리쉬나의 부담이다. 끄리쉬나는 조련사를 그만두고 결국 정글에 코끼리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다. 집에는 자주 올 수 없지만 급여가 늘어난다.

박 PD가 살았다면 한 차례 더 네팔을 방문해 끄리쉬나의 정글 생활을 카메라에 담았을까. 이제는 확인할 수 없는 엔딩을 대신해 ‘엘리펀트보이’는 박 PD가 생전에 코끼리를 촬영하던 모습으로 마무리했다. 동생 박씨는 “형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사람을 그리워했던 이, 인간으로서나 PD로서나 고집스러웠던 사람, 사람보다는 동물을 더 좋아했던 PD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엘리펀트보이’는 KBS와 일본 공영방송 NHK, 대만 공영방송 PTS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DMZ다큐영화제 상영 이후엔 KBS와 NHK에서 상영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