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가 사내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 이후 수개월 만에 첫 인사 조치를 취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직원이 중징계를 받은 가운데 KBS 안팎에서 우려했던 대로 징계시효에 가로막혀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KBS는 사내 성폭력 문제가 불거진 타 언론사에 비해 대응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난 2월7일 언론계 ‘미투’ 첫 사례라 볼 수 있는 전직 기자의 SNS 폭로 이후, 파이낸셜뉴스는 가해자로 지목된 기자를 정직 6개월 처분했고 YTN은 약 일주일 뒤 가해 지목 기자에게 정직 6개월 처분을 내린 데 이어 4월 재심에서 해당 기자를 해고했다. 2월28일 과거 방송작가 성폭력 혐의가 알려진 YTN PD 또한 4월 해고됐다. 반면 비슷한 시기 과거 성폭력 정황을 인지한 KBS 감사실은 6개월이 지나는 동안 감사를 진행 중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반복해왔다.

지난 2월 이후 KBS 감사실에서 감사를 진행해온 것으로 파악된 과거 성폭력 사례는 3건. 모두 여성 비정규직에 대한 남성 정규직의 가해 의혹이다. 지난 2014년과 2016년 두 명의 피해자가 확인된 김아무개 PD는 지난달 24일자로 정직 3개월 처분을, 지난 2012년 부서 MT에서 비정규직 직원을 성추행한 의혹으로 감사 받아온 백아무개 기자는 주의를 받았다. 지난 2014년 두 명의 비정규직 직원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한 최아무개 카메라기자에 대한 감사는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 PD의 성폭력 가해 사실은 지난 2월2일 B씨의 온라인 신고로 감사실에 전해졌다. 이 피해자는 해당 PD가 술자리에서 성경험을 묻거나 신체를 접촉하는 등 성추행을 가했다고 밝힌 뒤 “지난 시간 사건을 똑 부러지게 해결하지 못했고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괴로워하기만 했다”며 “굉장한 용기를 내어 사건을 제보하는 바이며 정확하고 제대로 된 조사를 요청한다”고 했다. B씨는 성추행 피해 당시 계약직 직원으로서 첫 사회생활이기에 대처 방법을 알지 못했다며 불이익을 받게 될까 걱정했다고도 전했다.

감사실로부터 2차 피해를 겪었다는 호소도 나왔다. ‘익명 보장’과 ‘처리 후 결과 안내’라는 설명을 믿고 용기를 냈지만, 감사실로부터 고압적인 조사를 받아야했다는 것이다. B씨는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녹음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듣거나, 다른 피해 사례를 알아오라는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성폭력을 제보한 뒤 KBS 감사실 조사를 받은 복수의 당사자들은 감사실이 제보 내용이나 자료를 숙지하지 않은 채 피해 상황 설명을 요구했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관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관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반면 가해자로 지목돼 감사 대상에 오른 김 PD는 조용히 타 부서로 발령돼 구성원들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 2월28일 KBS 여성 직원들은 사내 게시판에 “더 이상 공범자가 되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올려 “비정규직 여성의 용기로 직장 내 성희롱 사건 감사가 진행 중”이라며 “관리자들이 감사 대상자를 은밀하게 타 본부로 발령 냈다가 뒤늦게 알게 된 유관 부서원들 항의로 결국 재발령을 냈다”고 지적했다.

여성 직원 540여 명이 연서명한 해당 성명은 “비정규직 여성의 성폭력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명백한 폭력이고 생존권을 위협하는 ‘갑질’”이라며 △성폭력 가해에 대한 강력한 징계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창구 마련 △인사위원회 남녀 성비 1:1 구성 △감사 대상자 대기발령 △2년인 징계시효 5년 이상 연장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적된 문제들은 개선되지 않았다. KBS는 주요 방송사 가운데 유일하게 성폭력 관련 징계시효 2년을 두고 있다. 지난 2월 KBS 비정규직이었던 C씨 폭로로 알려진 2012년 백아무개 기자 성추행 의혹이 대표 사례다. C씨는 지난달 15일 ‘KBS 감사에 대한 입장문’을 통해 “사건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저는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했고 무혐의 처분을 받아 감사 재개 요청을 드렸다”며 “이번이 KBS를 마지막으로 믿는 것이다. 백 기자 파면 또는 해임을 원한다”고 주장했다.

KBS 감사실은 “특별 감사 결과 피해 사실 주장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정황상 사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책임을 엄중히 묻고자 했다”면서도 백 기자에게 ‘주의’ 처분을 내렸다. 징계시효를 원인 발생일로부터 2년으로 둔 사규로 인해 징계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다. KBS에 따르면 ‘주의’는 ‘위법 부당한 사항으로서 기한이 경과돼 이를 수정할 수 없거나 시정 대상이 되지 아니하는 사항’으로 인사 상 징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남성 고위직으로만 구성된 KBS 인사위원회도 개선 대상으로 지목된다. KBS 여성협회는 지난 3월 공정하고 객관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성폭력 분야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 등 외부전문가가 조사 및 인사위원회에 참여하고, 특정 성(性)이 60%를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KBS 이사회는 지난달 말 방송통신위원회 권고에 따라 특별인사위원회에 2명의 외부 전문위원을 두기로 의결했다. 외부위원은 아직 선임되지 않았다. 지난 7월 발족한 KBS 성평등센터는 오는 10월경 개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월 KBS 퇴사를 앞둔 한 직원은 사내 게시판에 “최근 미투 선언을 보며 말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본인의 과거 성폭력 피해를 알렸다. 이제는 전직 KBS 구성원이 된 그는 “이 글로 누군가 상처받지 않을지 회사를 떠난 한 개인의 사소한 폭로 수준으로 덮이지 않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했다. ‘미투’를 특정 개인의 성폭력 폭로로 규정하고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것 또한 피해자들의 우려라는 의미다.

지난 4월 공영방송 KBS 회복의 열망을 안고 취임한 양승동 KBS 사장은 취임식에서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성평등 문제는 처벌 수위를 확실히 높이겠다. 절대 쉬쉬하며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파면을 포함하여 가능한 최대치의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