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영 판사가 왜 우리를 만나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의무입니다. 공직에 있었고 다시 공직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사건에 대해 사안별로 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관예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시절 적폐 판사들이 일관되게 걸어간 꽃길입니다. 인생 2막을 시골판사로 법의 혜택 보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살겠다면 지겨운 전관예우를 끊고 꽃길을 거부하십시오.”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해고 노동자들이 지난 10일 서울에서 전남 여수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시골판사’가 된 박보영 전 대법관을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박 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작성된 이른 ‘재판 거래’ 의혹 문건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법부의 협력 사례”로 적시된 판결을 내린 장본인이다.

박 판사는 이날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면담을 거부하고 “고향 쪽에서 근무하게 돼 기쁘다. 초심을 잃지 않고 1심 법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겠다”는 첫 출근 소감만 밝혔다. 그는 11일 오전 10시께 출근하며 연합뉴스 기자를 만나 “법관은 연예인이 아니라 공직에 충실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인터뷰를 사양했다고 한다.

▲ 박보영 전 대법관이 지난 10일 오전 전남 여수시 여수시법원에 경호원과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박보영 전 대법관이 지난 10일 오전 전남 여수시 여수시법원에 경호원과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쌍용차 해고자들과 기자들이 박 판사가 단순히 연예인처럼 유명해서 인터뷰를 요청하고 면담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가 대법관 주심이라는 매우 중요한 공직에 있으면서 내린 판결이 과연 법관으로서 공정성과 독립성을 잃지 않고 충실히 내린 판결이었는지 국민이 묻고 있다.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사법농단 문건에 수차례 등장하는 조선일보는 11일자 16면 머리기사에서 “일부에서 당시 대법원 판결을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중 하나라고 꼽았다. 그러나 실제 쌍용차 재판 결과가 정권에 유리하게 내려졌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양승태 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은 쌍용차 판결 1년 뒤에 작성됐는데 먼저 나온 판결로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는 논리다. 조선일보가 양승태 사법농단 문건을 두둔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역시 문건에 명백히 적시된 내용과 다르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언급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은 2014년 11월 쌍용차 대법원 판결이 난 1년 뒤가 아닌 2015년 7월 작성됐다.

2015년 7월31일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
2015년 7월31일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
이 문건에서 박보영 판사가 연루된 재판 사례는 대법원의 ‘철도노조 파업 업무방해 사건’(2014년 8월20일)과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2014년 11월13일), ‘대통령긴급조치 국가 손해배상 소송’(2015년 3월26일) 파기환송 판결 세 가지다. 이중 박 판사는 쌍용차와 철도노조 재판의 주심 대법관이었고 긴급조치 판결 땐 재판장이었다.

법원행정처는 대통령긴급조치 사건 판결에 요지를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음”이라고 소개하며 “대통령긴급조치가 내려진 당시 상황과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고려했다”고 했다. 당시 이 판결에 대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대법원은 법률가로서 납득하기 여려운, 법원의 존재 의의를 의심케 하는 판결을 했다”며 “대법원은 또다시 정의를 외면하고 유신의 품에 안겼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법원행정처는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을 두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등을 위해서는 정리해고 요건의 정립이 필요한데, 선진적이고 유연한 기준 정립을 위해 노력함”, 철도노조 파업 사건은 “노사 갈등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하여 파업의 법적 기준을 정립함”이라며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11일자 16면.
조선일보 11일자 16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5년 11월19일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전략 추진’ 문건에선 이상의 사건들을 언급하며 “그동안 사법부가 “VIP(박근혜)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한다”고 나와 있다.

임 차장은 그러면서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도 주문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양승태 사법부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물밑에서 판결을 조율했다’고 나온 문건을 보고도 “실제 쌍용차 재판 결과가 정권에 유리하게 내려졌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믿을 독자가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법농단 문건 가운데 조선일보가 연루된 것만 △(150128)상고법원 기고문 조선일보 버전(김◎◎) △(150203)조선일보 상고법원 기고문(김◎◎) △ (150203)조선일보 칼럼(이○○ 스타일) △(150330)조선일보 첩보 보고 △(150331)조선일보 기고문 △(150427)조선일보 홍보 전략 △(150504)조선일보 기사 일정 및 콘텐츠 검토 △(150506) 조선일보 방문 설명 자료 △(150920)조선일보 보도 요청 사항 등 9건이다. 조선일보는 박보영 판사를 감싸기보다 자중하며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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