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금성의 고백 ‘김정일은 안 만나고 장성택 만났다’”

지난 11일자 중앙SUNDAY 지면기사(8면) 제목이다. 박용한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이 전직 대북공작원 ‘흑금성’ 박채서씨를 인터뷰했다.

박용한 위원이 박채서씨에게 한 첫 질문은 “영화엔 김정일과 만나는것으로 나온다”였다. 다음은 지면기사 일문일답 도입부다.

Q. 영화엔 김정일과 만나는 것으로 나온다.

“안 만났다.”

Q. 그렇다면 북한에서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

“외화벌이 창구를 노렸다. 장성택을 만났다. 북한과 중국에서 만났는데 베이징에서 더 많이 봤다.” 

한 광고 회사에 위장 취업한 박채서씨는 남북 합작 광고를 찍는 사업을 추진하며 북한을 오갔다. 공작의 일환이었다. 그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위장 침투해 1996년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만났다고 한다. 인기리 상영 중인 영화 ‘공작’도 박채서씨의 대북공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도 박채서씨 역을 맡은 황정민(극중 박석영)과 김 위원장 만남이 하이라이트다.

▲ 지난 11일자 중앙SUNDAY 흑금성 인터뷰 기사. 박채서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제목과 내용은 온라인 기사에서 수정됐다.
▲ 지난 11일자 중앙SUNDAY 흑금성 인터뷰 기사. 박채서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제목과 내용은 온라인 기사에서 수정됐다.
중앙SUNDAY 온라인 기사는 노출 당일인 11일 수정됐다. 제목은 “흑금성의 고백 ‘김정일은 안 만나고 장성택 만났다’”에서 “흑금성의 고백 ‘베이징에서 장성택 만났다’”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문답은 삭제됐다. 두 번째 질문도 “그렇다면 북한에서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에서 “북한에서 가장 자주 만난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박채서씨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내용이 삭제됐다.

원래 박채서씨는 월간지 ‘월간중앙’ 인터뷰를 기대했다. 월간중앙 기자의 취재 요청은 영화 원작인 논픽션 ‘공작’을 지난 7월 펴낸 김당 UPI뉴스 기자를 통해 왔다. 김당 기자와 박채서씨는 월간중앙은 지면도 많고 대중 인지도도 있어서 인터뷰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난 10일(금요일) 정작 인터뷰를 진행한 인터뷰어는 월간중앙 기자가 아니라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박용한 기자였다. 인터뷰를 요청한 월간중앙 기자는 인터뷰 당시 옆에 있었다고 한다. 박채서씨는 인터뷰가 끝난 뒤 ‘내일 신문에 나갈 것이고 월간지는 추후 보강해 준비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 중앙SUNDAY에 실린다는 이야기는 사전 조율되지 않았다.

실제 인터뷰는 월간중앙이 아닌 ‘중앙SUNDAY’에 보도됐다. 그것도 박채서씨가 김 위원장을 만난 적 없다는 내용과 제목이었다. 박채서씨는 인터뷰 이후 영화 ‘공작’ 관계자들 항의를 받았다. 영화 하이라이트가 흑금성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는 장면인데 그걸 전면 부정하는 인터뷰가 나왔는데 어찌된 일이냐는 것.

▲ 흑금성 박채서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지난 11일자 중앙SUNDAY 지면기사는 온라인에서 제목과 내용이 수정됐다.
▲ 흑금성 박채서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지난 11일자 중앙SUNDAY 지면기사는 온라인에서 제목과 내용이 수정됐다.
기사는 박채서씨가 박승희 중앙SUNDAY 편집국장에 항의하고 나서 수정됐다. 박승희 국장은 지난 13일 미디어오늘 통화에서 “박채서씨 인터뷰는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박용한 박사(북한학)가 진행했다”며 “중앙SUNDAY는 출입기자가 충분하지 않아 금요일에 발생하는 콘텐츠를 (중앙일보에서) 공급받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국장은 중앙SUNDAY 인터뷰 수정에 “박채서씨가 직접 전화해 ‘나는 김정일을 만난 적 없다고 한 적 없다’고 했고 반면 취재기자인 박 위원은 ‘김정일을 만난 적 없다는 뉘앙스로 들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박채서씨는 김당 기자를 통해서라든지 여러 각종 자료에서 김정일을 만났다고 주장해 왔다”며 “김정일을 만났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우리 인터뷰에서 갑자기 ‘만난 적 없다’고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박채서씨 항의가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해 디지털 기사에서만이라도 제목을 바꿔주자고 한 것이다. 우리가 의도가 있었다면 그와 인터뷰할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채서씨와 김당 기자는 미디어오늘에 “중앙SUNDAY 기사는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월간조선은 2018년 9월호 “영화 공작의 모티브가 된 ‘흑금성’ 박채서의 실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중앙SUNDAY 기사를 인용해 “‘안기부 보고서’엔 ‘김정일 만났다’고 돼 있는데 20년 후엔 ‘안 만났다’고 부인”이라고 보도했다. 수정된 중앙SUNDAY 온라인 기사가 아닌 원 지면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 영화 ‘공작’ 포스터. 주연 배우인 황정민(극중 박석영)은 대북공작원 흑금성 박채서씨 역할을 맡았다.
▲ 영화 ‘공작’ 포스터. 주연 배우인 황정민(극중 박석영)은 대북공작원 흑금성 박채서씨 역할을 맡았다.
박채서씨는 24일 오전 tbs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김정일을 만난 사실은 지난 1998년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면서 처음으로 공개됐다”며 “이대성 파일을 공개한 사람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최고 수장이었다. 작성한 사람은 이대성 해외공작실장이었다. 그 책임자들이 공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안기부 전문가들이 이대성 파일을 전부 검증한 결과 박채서씨와 김정일 위원장 만남은 사실로 확인됐다는 이야기다.

이대성 파일은 김대중 정부 초인 1998년 3월 북풍 공작 수사가 본격화하자 권영해 안기부장과 이 실장 등이 자신들의 공작을 은폐하기 위해 ‘해외공작원 정보 보고’를 짜깁기해 만든 것이다. 이대성 파일 공개로 ‘블랙 요원’ 박채서씨 신원이 노출됐고 그는 안기부에서 해직됐다.

이날 방송에서 박채서씨는 “월간중앙 기자와 인터뷰하러 갔는데 엉뚱한 사람(박용한)이 나왔다”며 “그가 내게 ‘갈 때마다 김정일을 만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공작할 때마다 김정일을 만난 건 아니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언론들이 자기들 상상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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