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국가의 사기’. 전자는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 평전의 제목이다. 워싱턴 포스트 정치부 기자 출신 작가 마이라 맥피어슨이 썼다. 후자는 경제학자이자 ‘88만원 세대’의 저자로 잘 알려진 우석훈 경제학자가 올해 초 펴낸 책이다. 두 책의 메시지는 비슷하다. 정부(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기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국가의 사기를 목격하기도, 비판하기도, 그리고 방관하기도 가장 좋은 자리에 있다.

2016년 경제지 4년차 기자로 금융부를 출입했다. 당시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범정부 부처가 참여한 ‘전 산업 구조조정’이 큰 이슈였다. 조선, 해운, 석유화학 등 산업별로 구조조정, 즉 시설과 인력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대형 선박과 플랜트를 짓는 조선업은 규모가 컸던 만큼 대수술이 불가피했다. 한때 조선업은 현재의 반도체나 스마트폰처럼 우리나라 수출 GDP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대형선박을 만들 일도 줄었고, 대형 선박에 실을 화물도 줄었다. 활황기 대비 최소 3분의 1, 최대 절반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변양호 신드롬. 2003년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파는 일을 주도했던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이 헐값 매각 시비에 휘말려 구속된 사건에서 유래했다. 이후 관료(공무원)들의 책임 회피 또는 보신주의 경향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 연합뉴스
▲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 연합뉴스
조선업 대수술을 앞두고 정부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 의뢰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구조조정을 실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출혈이 불가피한 대수술인 만큼 수술이 잘 되든 안 되든 비판의 화살을 막을 수 있는 외부 기관의 방패를 마련한 것이다. 수술대에 오를 ‘조선 빅3’ 기업은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이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 국가 단위 프로젝트를 맡기면 보통 그쪽에서 의뢰인에게 대략적인 ‘와꾸’(방향, 가이드라인)를 먼저 물어봅니다. 큰 건인 만큼 의뢰인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내준다는 거죠.”

이변이 발생했다. 정부와 조선해양플랜트협회의 컨설팅 의뢰를 받은 맥킨지는 “대우조선해양의 독자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정부의 말이 바뀌었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의 수십억 원짜리 보고서는 ‘참고자료’로 전락했다. 결국은 정부가 애초에 추진하기로 했던 ‘조선 빅3’의 공평한 고통 분담, 즉 각 회사별로 3분의 1씩 인력과 도크(공사 시설) 등을 줄이는 방식으로 결정됐다.

정부는 왜 말을 바꾸고 수십억 원짜리 방패를 버렸을까. 대우조선해양은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과 달리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주인인 회사였다. 사실상 정부가 주인인 회사로 그동안 분식회계, 낙하산 인사의 온상으로 꼽히던 부패의 집합소였다.

▲ 대우조선해양 홈페이지.
▲ 대우조선해양 홈페이지.
컨설팅 그룹의 발표가 있기 전, 산업 구조조정 컨트롤 타워의 핵심인물 중 한 명에게 물을 기회가 있었다. “조선업 구조조정 방안은 합리적인 경제적 원칙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정무적 판단까지 고려한 것인가.” “정무적 판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 이환주 파이낸셜뉴스 부동산부 기자
▲ 이환주 파이낸셜뉴스 부동산부 기자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가 달려있던 것처럼 시끄러웠던 산업 구조조정 이슈는 그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탄핵 정국,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서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잠잠하던 시기 기자는 금융부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금융부 기자 시절 들었던 당시 정부의 약속(추가적인 세금 투입은 없다 등등), 혹은 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뀌어서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기자는 출입처가 아니라 기사를 쓰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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