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달 만에 나와 해직기자가 된 유숙열 기자는 27살 청춘에 백수가 돼 할 일이 없어 사회과학 서적을 파고 들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낸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읽었다. “어머, 이거 내 얘기네”하고 페미니즘을 받아 들였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 가서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배웠다. (관련 기사 : 80년 이근안에 고문 당한 27살 기자의 해직 40년 세월)

1991년 귀국해 새로 창간한 문화일보에 들어갔다. 유숙열 기자는 여성정책에 젠더 개념을 넣은 기사를 자주 썼다. 3년 뒤 노조를 만들고 파업도 했다. 부당인사에 저항하려고 노조를 만들었지만 정작 유 기자가 찍혔다. 새 사장이 올 때마다 제거 대상 1호였다. 대기발령도 받았고, 기자 없는 지원부서로도 여러 번 발령 났다. 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결정으로 원직 복직도 했다. 한 번은 중앙노동위원회까지 가기도 했다.

같이 노조 만들었던 편집국장마저 “제발 좀 튀지 말라”고 했다. 후배 밑에 전문위원으로도 일했다. 회사는 여기저기서 나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여성들만의 매체 ‘이프(IF)’ 창간을 주도했다. 출근하면 숨을 못 쉴 정도로 힘겨워 2004년 사표를 쓰고 나왔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맹렬하게 맞서다가 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유숙열 기자에게 한국 페미니즘의 현재와 미래를 들어봤다.

- 문화일보 사직, 이프(IF) 폐간과 함께 가정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여성들만의 매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1997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계간지였다. ‘이프’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1997년 여름호로 창간해서 2006년 봄까지 모두 36호를 발간했다. 2004년 문화일보에 사표 낼 때쯤 이프도 재정난으로 그만둬야 할 지경이었다. 2004년에 22년을 살았던 남편과 이혼했다. 일하면서 가정을 포기하다시피 했으니까 남편이 그걸 못 견디고 그냥 나가버렸다. 대학 때부터 오래 사귄 남자친구였고 페미니즘에 이해가 굉장히 깊었다. 문화일보는 석간이라 새벽에 출근하는데다 노조 때문에 밤늦게 들어갔지, 이프 한다고 돈도 다 쏟아부었지. 딸 하나 있는데 내게 가정과 사생활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남편도 힘들었을거다. 2009년 친정 엄마 돌아가셨을 때 남편이 돌아와 사위 노릇을 했다. 그 일로 그 사람에게 감동했고 이혼 5년 만에 재결합했다. 내가 잘못한 게 많았다. 한국인데도 나는 폭주 기관차처럼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았다. 2005년 병원에 처음 입원했는데 회복하는데 7년 걸렸다. 그렇게라도 고장이 나서 다행이지.”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흥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어려운 시간을 견딘 힘은?

“이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다. 지난해 이프 20주년에 맞춰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라는 책을 이프 관계자들이 100만 원씩 모아서 출판했다. 그래서 출판사를 시작했다. 그 네트워크가 나를 살렸다.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나는 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그 사람들이다. 2005년 봄 이프가 주관한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합숙훈련 갔다가 내가 거기서 이상을 보이자 동료들이 바로 여의도 성모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켰다. 이프 이사였던 성모병원 최보문 교수와 친구들이 나를 살렸다. 나이 50세에 ‘외로워서’라는 시집을 출판했다. 이혼했지, 직장 쫓겨났지, 다 쏟아 부은 이프도 끝나게 생겼지. 나는 유복녀로 태어났다. 엄마가 재혼하셔서 계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 성이 나와 달라. 내게 근본적인 상처였다. 이상해졌을 때 길거리 간판을 읽고 나와 상관관계를 찾으려는 증세가 있었다. 다섯 살 때 이름을 처음 배우던 시절로 돌아간 거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나는 생부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그리움이 동시에 있다. 내게 본질적인 박탈감. 회사에서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 그때로 돌아간 거야. 시를 쓰면서 극복했다. 꿈에서 아버지가 죽은 사람으로 나타나면 무서워서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그것을 시로 쓰면서 정면대결했다. 그게 시집으로 나왔다. 글쓰기에 치유능력이 있다.”

- 요즘 주의 깊게 보는 사회적 현상은?

“아무래도 워마드 논란이다. 워마드가 지금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지는데, 우연이 아니다. 언론이 워마드를 너무 악마화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7월7일 몰카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혜화역 시위에는 정부 수립 이래 단일 여성 주제로 최대의 여성 인파가 몰렸다.(주최측 추산 6만) 같은 날 기존의 여성운동단체인 16개 여성단체가 주최한 낙태 합법화 시위에는 약 1500명이 왔다. 온라인으로만 동원해도 나오는 2030 젊은 여성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다. 지금 대한민국은 집단적인 과격한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출현을 보고 있다. 이것은 큰 사건이다.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 2012년 김두식과 인터뷰에서 “인생은 만남이고 사랑인 거 같다. 이제 남자들도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가 함께 가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워마드 등 젊은 친구들이 과격한 원인은 사실 90년대 한국사회의 가공할만한 여아 낙태에 있다. 여자가 특히 팔자가 세다는 말띠(내가 말띠다), 용띠, 범띠해. 이 세 해에는 여아들이 더 많이 죽었다. 전국 남아 대 여아 출생비율 평균은 116대 100인데 경북 안동, 대구는 136대 100까지 갔다. 그렇게 자란 여자애들이 그 때를 제노사이드라고 말한다. 사회적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 후유증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미투 운동도 한창인데 그것도 젊은 세대 페미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온라인에서 페미니즘을 체험하는 10~30대는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거하고는 전혀 다르게 페미니즘을 경험한다. 그들이 분노하는 걸 더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들여다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갈 거다. 왜냐면 자기네들이 다 체험하고 아는데. 워마드 친구들도 메갈리아에서 밤 새워 싸우면서 경험한 그거를 다 이야기 하더라. 남자들과 싸워 이긴 경험을 한 친구들은 몰카에,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도 그렇게 많이 나왔잖아요. 수사당국은 ‘묻지마 범죄’라고 했다. 이 친구들은 여성이라서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소라넷은 16년 동안 방치했는데, 여자가 그러니까 당장 수사해서 포토라인에 세웠다. 그러니 몇 만 명이 나온 거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그들의 분노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 요즘 다른 나라의 페미니즘 운동방향은?

“미국이나 유럽, 인도 등 페미니즘은 제각각 발전하고 있다. 최근 칠레에선 미투와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며 7개 대학을 페미니스트들이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페미니즘은 나라마다 겪은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 다르게 발전한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특징이다. 페미니즘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아내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딸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개별적이다. 개인이 모여 집단 움직임으로 발현될 때, 각각의 문화 속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모양일 수 없다.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 언론인으로 현재까지 활동중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맹렬하게 맞서다가 병원에 입원했다. 유 대표가 이프북스에서 출판한 책인 ‘근본없는 페미니즘’과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이치열 기자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 언론인으로 현재까지 활동중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맹렬하게 맞서다가 병원에 입원했다. 유 대표가 이프북스에서 출판한 책인 ‘근본없는 페미니즘’과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이치열 기자
- 한국 페미니즘 운동은 어떻게 진화할지?

“한국 남성들이 가부장적이라서 페미니즘 운동은 더 강하게 발화할거다. 우리가 민주화를 겪었지만, 여성운동은 보조적 위치에 머물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법적제도 꽤 갖춰졌지만 인식은 변화가 없었다. 이제 거기서 벗어날 단계다. 요즘은 자녀가 1~2명이라 그렇게 자란 10~30대 여성은 크게 차별 받은 경험이 없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고 결혼하면 성차별에 크게 부딪힌다. 미쳐버리는 거다. 김지은씨 예를 들면 잘 자란 사람이 사회에 나와선 안희정 같은 남자에게 “괘념치 말거라” 이런 말이나 듣고. 이조시대 왕도 아니고. 4050아저씨들이 움직이는 사회에 부딪히니까 미투할 수밖에 없다.”

- 편집국내 여성 비율 42.8%, 임원 비율은 3%(17년 기준)가 언론사 성평등 통계다.

“여기자들이 어느 부서든 갈 수 있어야 하고 숫자도 늘어나야 한다. 결국 권력 문제다. 여자들이 다수가 되면 그런 성역도 없어지고 공정한 경쟁과 승진이 가능하다. 여자라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똑같이 경쟁해서 살아남아야지. 언론사 안에서도 더 많은 권력의 자리에 진출해야 한다.”

- 주류 언론이 페미니즘에 훈계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의 입장에 선 기사가 더 많이 나오려면?

“워마드 기사에는 항상 훈계가 나온다. 워마드는 익명이고 굉장히 유동적인 불특정 다수다.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중에서 재미로 올린 애들도 있고, 일베나 소라넷 가서 미러링한다고 올려 놓은 걸 보고, 그게 마치 워마드의 대표인 양, 여성 전체로 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 언론은 항상 여성들에게 훈계한다. 바꿔야 한다. 훈계하는 기사와 데스크, 동료 기자의 부당한 성차별 행동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혜화역 시위 주최 세력도 자신들 이름을 ‘불편한 용기’로 했더라.”

- 페미니스트들에게 한마디, 특히 언론사에서

“전쟁을 하려면 꼭 이길 전쟁을 해라. 사사건건 작은 전투를 다 이길 순 없다. 그래선 전투에 이기고도 전쟁에서 진다. 유머 감각을 갖고 대처해라. 나는 ‘한 술 더 뜨기’ 작전이라고 말한다. 유머로. 결혼하면 왜 애 언제 낳느냐고 마치 자기네들이 다 봐줄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시어머니가 자기가 키워 줄 테니까 애 하나 더 낳으라고 했는데 나는 웃으면서 ‘낳으려 해도 안 생겨요’라고 대꾸했다. 동시에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길 전쟁을 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언론사에서 우리가 같이 일하는 상사, 데스크, 집에서 만나는 아버지, 남편, 친척, 새벽 출근길에 만나는 택시기사(남편 밥은 누가 해주냐고 말하는)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취재원까지 모두가 성차별의 주범들이다. 전쟁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허구한 날 전쟁만 할 수는 없다. 전쟁을 시작하면 목숨 걸고 이길 전쟁만 하면서 살아남아라. 우리가 지난해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을 출판했더니 경향신문에서 워마드를 직접 인터뷰 하게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워마드가 워마드를 말한다’는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이다. 여기자라도 페미니즘을 이상하게 쓰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받아 들이냐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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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0~27일까지 신군부의 광주학살 보도 금지에 항의하면서 검열 및 제작 거부를 벌였다가 해직당한 기자가 1000여 명에 달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자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던 이분들은 명예회복은커녕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배상조차 받지 못했다.

80해직언론인협의회는 다음달 6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를 열어 1980년 언론인 해직 사건과 언론 민주화 운동을 다시 조명하고 해직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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