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이 지난 12일 보도자료를 내고 “김구 선생이 1919년 8월12일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명돼 3년간 경찰조직을 이끌었다”며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임시정부 경찰사를 담은 총서를 발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3일자 10면에 실린 이 기사를 보고 2005년 봄 KBS 탐사보도팀을 도와 ‘누가 일제의 훈장을 받았나’(2005년 7월24일 방영)를 만들던 때가 생각났다.

국가기록원은 2004년 12월 일본 내각 상훈과의 공식문서인 ‘서훈’을 일본 공문서관에서 발굴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경향신문 2004년 12월10일 1,5면) ‘서훈’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들에게 일본 정부가 내린 상훈 내용을 수록한 문서다. 국가기록원은 이 문서를 일본의 국가기록원에 해당하는 공문서관에서 발굴해 분류작업중이라고 했다.

국가기록원은 이 문서가 과거사 규명 움직임과 맞아 떨어져 파장을 고려해 은밀하게 사실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며 공개될 경우 후손의 반발 등이 우려돼 표지사진조차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표지사진조차 공개 못한다는 국가기록원 때문에 국내에서 이 문서에 접근할 길은 막혔다. 당시 KBS 탐사보도팀은 발상을 전환해 일본 공문서관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 정부 입장에선 제 나라에 좋은 일을 한 이에게 훈장을 줬을 것이고, 그런 만큼 훈장을 준 공적조서를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가설은 맞아 떨어졌고 KBS 탐사보도팀은 일본 공문서관에서 188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로부터 훈장 받은 한국인 3304명의 서훈기록을 모두 열람하고 복사해왔다.

나는 3304명의 간단한 공적기록을 엑셀파일로 받아 3개월 동안 이들의 해방 이후 행적을 추적했다. 일제의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검찰총장, 대법원장, 참모총장 등 요직을 누렸다.

훈장 받은 사람들 직업은 교육자가 684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찰이 582명, 군수가 499명 순이었다. 교육자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하면 웬만하면 최하위 8등급 훈장을 줬기에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훈장 받은 한국인 경찰 582명은 대부분 조선독립운동을 가로막는 첨병이었다. 이들 가운데 지금의 경찰서장(총경)급인 경시가 34명, 그 아래 경정에 해당하는 경부가 59명이었다.

친일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은 1941년 창씨개명한 마쓰우라라는 이름으로 서보장을 받았다. 노덕술은 일제 때 순사로 출발해서 무수한 독립 투사들을 체포, 고문했다. 연구보로 시작해 경시까지 오른 김창영은 1937년 6등 서보장을 받았다. 김창영은 미군정 때 서울시장을 지냈고, 노덕술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지냈다. 일제의 훈장을 받은 식민지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상당수 요직을 그대로 차지했다.

582명의 훈장 받은 한국인 경찰의 해방 이후 행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만해도 일선 경찰서와 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엔 1910년부터 역대 서장과 청장의 이름과 사진, 재임기간을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려놨다. 이들을 훈장받은 경찰과 대조하는 수작업을 이어갔다.

적어도 2005년까지 한국 경찰은 1910년 한일병합을 자신들 출발점으로 삼아 일제 친일경찰을 선배로 모셨다. 그런 경찰이 이번엔 1919년 임시정부 시작과 백범 김구 선생을 제 뿌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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