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영(具壽永)은 영응대군(永應大君: 세종대왕 8남)의 사위다. 폐주(廢主: 연산군) 때에 스스로 자기 여종을 골라서 궁중에 바치고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못된 짓을 자행하여 권세가 임금과 같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반정 때에 여러 장수들이 그를 때려죽이려 했는데, 마침 구수영의 집안사람이 그 사실을 구수영에게 누설했다. 그리하여 그가 먼저 장수들 회의하는 곳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반정의 공훈을 받게 되니 당시 사람들이 분하게 여겼다.’ 중종 5년(1510년) 12월26일에 실록에 기록된 구수영에 관한 사관의 기록이다.
구수영은 누구인가. 바로 연산군의 사돈이자 중종반정 2등공신이다. 그가 반정 뒤에도 임사홍과 달리 살아남은 이유는 세조의 친인척이라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세조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막내 동생 영응대군이 정실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와 사이에 길안현주(吉安縣主)라는 딸 한 명 만을 낳고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송씨 부인이 바로 세조의 친구였던 송현수(宋玹壽)의 누이였다. 사랑하는 동생과 친구 누이의 유일한 외동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세조가 직접 나섰고 그 결과 사위로 정해진 사람이 바로 구수영이었다. 구수영이 영응대군의 사위가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외조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세조비 정희왕후와 외사촌 자매간이라는 사실이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수영은 이후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찬탈 세력의 후예들과 밀접한 혼인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맏아들을 정희왕후의 조카인 윤보(尹甫)의 사위로, 둘째 아들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겸(愼守謙)의 사위로, 둘째 딸은 임사홍의 며느리로 만들었다. 구수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왕과 사돈이 되는데 바로 넷째아들 구문경(具文璟)을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혼인시켜 부마(駙馬)로 만들기까지 했다. 왕조시대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곧 왕실의 사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실감이 남달랐던 구수영은 이참에 연산군과 인연을 아예 끊어버리려 했다. 바로 연산군의 사위였던 자신의 넷째아들 구문경을 휘순공주와 강제 이혼시키기 위해 상소했고, 중종은 그것을 허락했다. 자신의 아들이 죄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구차한 변명일 뿐,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저질렀던 죄과를 덮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반정공신들은 구수영의 상소에 동조하면서 중종에게 이혼을 허락하길 청했지만, 삼사에 포진해있던 개혁파 사림(士林)들은 그의 이러한 행실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공신 자격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죄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신들의 비호로 죄를 받진 않았지만 그는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는 사헌부의 수장으로서 사림의 지지를 받던 대사헌 정광필(鄭光弼)의 의견에 따라 다시 부부로서의 인연을 이어갔다. 기득권 유지에 탁월한 감각을 발휘한 아버지를 둔 덕에 그 아들은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임금의 사위도 되었다가, 세상이 바뀌자 강제 이혼도 당하고 또다시 재결합하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최근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집권 여당의원 시절에 자신과 지연·학연으로 밀접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인사청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그 의혹의 증거가 된 문자메시지가 공개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소속 정당인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나와 ‘깨끗한 보수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며 새 정당을 창당했다. 마치 자신들은 국정농단에 아무런 도의적 책임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던 의원이 보낸 문자메시지였기에 충격이 적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