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을 감내할 수 있는가’, ‘성희롱의 순간을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지난 2월 본인의 성추행·성희롱 피해를 폭로했던 전직 기자는 면접장에서 들어야했던 질문들을 떠올리며 “‘나는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사회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어도 입을 열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최근 일부 일간지에서 터져나온 간부들의 성희롱성 발언과 성추행 논란이 기사화된 뒤 몇몇 기자들은 ‘우리 회사라고 사정이 얼마나 다르겠느냐’고 자조했다.

‘미투’ 운동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던 언론사들이 정작 곪아터진 내부를 자정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진 가운데, 일부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감수하며 언론계 성폭력을 폭로했다. 방송사들은 앞 다퉈 성폭력 전담 조직을 만들고 관련 기준 제정에 나섰다. 성폭력 문제 공론화와 사측 대응 방향은 긍정적이지만, 실질적으로 피해를 예방하고 구성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근본 과제가 있다.

지난해 12월 SBS는 지상파 중에서 가장 먼저 사내 성희롱·성폭력 징계 내규를 확정했다. SBS 노사 합의로 만들어진 내규에는 직장 내 성범죄 대응 절차와 처벌 기준이 담겼다. 가해 행위를 △성폭행 △성추행 △성적 언동 △기타 등으로 분류하고 각 항목에 따라 최소 감봉에서 최고 해고 처분까지 가능하도록 명시했다. 내규 적용 대상은 SBS 직원 뿐 아니라 파견·도급·협력업체, 거래업체, 유관단체 등 SBS 업무 및 고용과 관련한 모든 사람이다.

SBS는 기존 3개 부서로 나뉘어있던 성폭력 신고 창구를 HR팀으로 통합하고, 각 본부·실·센터 별로 피해자 지원을 위한 ‘신고도우미’ 제도를 시행했다. SBS 관계자는 이 제도와 관련해 “민감한 사안을 직통으로 전하는 ‘핫라인’을 마련한 것”이라며 “외주제작사나 프리랜서 등의 분들을 위해 현장을 이해하고 있는 직원이 도우미로서 역할하고 있다”고 밝혔다.

MBC는 지난 4월 MBC 관련 업무 수행자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성폭력 내규를 신설했다. △피해자 보호 우선 △신원 노출이 우려되는 자료 공개·누설 금지 △감사국·인사상담실에 전담 처리자 배치 △피해발생 부서장은 즉시 인사부에 신고, 즉시 조사 △피해자 요청 시 피신고인 분리 조치 △2차 가해자도 조사 대상에 포함 등 항목이 담겼다. 지난 6월엔 윤리강령에 업무상 성차별·성희롱·성폭력 금지, 2차 피해 방지 관련 조항을 넣었다. MBC는 고충처리창구인 ‘MBC클린센터’를 통해 성폭력 문제 신고를 받고 있다.

다만 일률적으로 정해진 양형은 없다. 조효정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성평등위원장은 “인사위에서 과거 전력을 고려해 징계 처분을 강하게 내릴 수 있다”며 “과거 성폭력 사안으로 정직을 받은 뒤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해 해고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사위에는 외부 전문가가 참여해 법률 자문을 더하고 있다.

조 위원장은 “서울 MBC본사의 경우 내규가 정비되고 ‘일벌백계’ 분위기가 형성돼 신뢰가 생겨나가고는 있지만, 지역사의 경우 불신이 있는 것 같다”며 “지역사는 특성상 소수의 사람이 장기간 함께 하는 조직이라 문제 해결이 어렵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우려하지 않고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려 한다”고 전했다.

▲ 왼쪽부터 KBS, SBS, MBC사옥. 사진=이우혁 대학생 기자·김도연 기자
▲ 왼쪽부터 서울 KBS, SBS, MBC사옥. 사진=이우혁 대학생 기자·김도연 기자

상대적으로 출발이 늦은 KBS는 지난 18일 방송사 최초로 사장 직속 성평등센터를 출범했다. 성평등센터는 향후 성폭력 예방지침 및 사건 처리 매뉴얼을 마련하고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및 방지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KBS는 성평등 관련 전문성이 있는 외부인사를 영입해 성평등 자문위원회를 운영하겠다고도 밝혔다. KBS 내부의 성차별·성폭력 엄정 대처는 양승동 KBS 사장 공약이기도 하다.

성평등 전담 기구 신설을 요구해온 전국언론노조 KBS본부(KBS본부) 양성평등국과 KBS여성협회는 성평등센터 출범은 시작일 뿐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공공기관 대상 여성가족부 권고 사항인 성희롱·성평등 예방지침이 사실상 사문화된 가운데 실질적인 성폭력 관련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2년으로 제한된 징계시효 개정 필요성이 제기된다. 지상파 3사 가운데 성폭력 관련 징계시효를 둔 곳은 KBS가 유일하다. 과거 KBS에서 일했던 A씨는 홀로 소송을 진행한 끝에 성희롱 피해를 인정받고 KBS에 가해자 징계를 요청했지만 ‘징계 시효가 지났다’는 답을 들어야했다. 박은희 KBS여성협회장은 미디어오늘에 “전반적인 인사 규정, 징계 양형과 시효 등 모든 규정을 개선 내지 신설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남정숙 전국미투생존자연대 대표는 언론계 성폭력 피해자들은 조직이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불신이 강하다며 이를 해소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자들의 경우 사수가 보고를 받고 컨펌하고 기자를 평가하는 시스템이다보니 사수에게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좁은 바닥에서 평판이 다 돌기 때문에 쉽게 얘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은 더 고립된 상황이다. 남 대표는 “대부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은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많이 일어난다. 그런데 공정해야 할 언론사가 기자들은 보호해주더라도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인 사례도 있다”고 비판했다. 방송사 노사가 성폭력 전담 기구를 신설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선뜻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이유다.

남 대표는 “어느 조직이든 징계위는 내부 고위직이 맡는다. 권력자들에게 줄을 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외부 전문가들, 예를 들어 미투연대 같은 피해자 단체들도 성폭력 관련 징계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언론계 환경은 남성 중심주의적이다. 여성들도 취약점을 인지한 뒤 제도적 마련에 나섰어야 한다”며 ”여성 직능단체들이 피해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본인도 언젠가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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