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을 기각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67페이지 분량의 계엄령 관련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탄핵 기각 판결을 염두에 두고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한 실행계획으로 드러나고 있다. 계엄령 선포 뒤 군 병력을 이동해 배치하기로 한 것은 총칼로 시민을 제압하겠다는 살인 계획과 다름없다.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언론통제 방안이다. 문건에 따르면 언론 통제를 위해 계엄사 보도검열단과 합수본부 언론대책반을 편성 운영하고, 군 작전 저해 및 공공질서 침해보도를 금지하는 검열지침을 하달한다고 돼 있다. 정해놓은 검열시간에 맞춰 보도물을 제출하라고 명하면서 보도검열 지침을 어기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보도매체 등록을 취소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언론을 겁박하고 통제하면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저열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 ‘대비계획 세부자료’란 이름으로 작성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세무 문건가운데 일부.
▲ ‘대비계획 세부자료’란 이름으로 작성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세무 문건가운데 일부.
이는 마치 1980년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언론을 통제했을 때와 흡사하다. 박정희가 죽고 비상 계엄령이 떨어지자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사회 불안을 안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계획에도 착수했다. ‘K 공작 계획’은 군부 독재의 언론 통제 총정리판이다.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보안사에 정보처를 신설하고 내부에 언론조종관을 뒀다. K공작 계획에 따르면 언론조종관은 보도검열을 하면서 한편으론 언론의 주요 인사를 접촉해 공작하는 활동을 벌였다. 언론사의 정보를 취합해 성향을 파악하고 언론 사주를 만나 정권에 협조하도록 했다. 말이 협조지 협박이었다. 신군부가 작성한 ‘중진 언론인 접촉순화 계획’에 따르면 전두환을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어려운 시기 국가의 운명을 거머쥐고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애국자’로 그리도록 했다.

지난 1980년 5월24일 신군부는 ‘광주소요사태의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시켜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며 신문 방송 통신사 사장 등 주요 언론사 간부 64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언론에 보도된 5·18은 과격 불순분자의 난동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정권에 매수된 언론을 믿을 수 없다며 광주 MBC 사옥을 불질렀다.

▲ 2017년 8월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문화공보부 내 홍보조정실이 각 언론사에 요구한 ‘보도지침’을 볼 수 있다. 사진=영화 ‘택시운전사’ 일부분.
▲ 2017년 8월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문화공보부 내 홍보조정실이 각 언론사에 요구한 ‘보도지침’을 볼 수 있다. 사진=영화 ‘택시운전사’ 일부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언론을 끝까지 통제했다. 전두환은 문화공보부 내에 홍보조정실을 만들어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언론사의 편집국장은 허수아비였다. 정권 비판 기사는 여지없이 삭제되거나 쳐박혔다.

“85년 11월5일 대학생들 민정당사 난입 사건은 사회면에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86년 1월15일 민정당 창당대회 대통령 치사 1면 톱기사로”, “86년 7월17일 성고문사건 검찰 조사 결과 발표 내용만 쓰고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 고소장 내용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신문 1면엔 항상 전두환의 얼굴이 나왔다. 밤 9시 방송 시작을 알리는 시보가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일명 땡전뉴스다.

과거 다행스러운 것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것도 언론이라는 사실이다. 월간 ‘말’은 1986년 9월6일 특별호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684건을 공개했다.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는 편집국장 자리로 걸려오는 전화 내용을 엿듣고 보도지침 내용을 받아 적고 자료를 모아 월간 말에 전달했다. 보도지침 사건의 전말이다.

▲ 1988년 국회 문공위 언론 청문회에 출석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왼쪽)의 모습과 2016년 김주언 전 기자(오른쪽)의 모습. ⓒ 연합뉴스(왼쪽), 김도연 기자(오른쪽)
▲ 1988년 국회 문공위 언론 청문회에 출석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왼쪽)의 모습과 2016년 김주언 전 기자(오른쪽)의 모습. ⓒ 연합뉴스(왼쪽), 김도연 기자(오른쪽)
이번 기무사의 쿠데타 계획이 실행됐다면 제2의 김주언 기자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정권에 부역했던 언론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박근혜 정권 청와대 대변인이란 사람이 대통령 순방 중 성추행을 저지르자 한 공영방송은 청와대 브리핑룸 화면과 태극기가 들어간 화면을 성추행 보도 화면으로 쓰지 마라는 지침을 내려 논란이 됐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란 사람이 방송사 간부에게 직접 전화해 ‘대통령이 방송을 보신다’며 세월호 참사 보도 확산을 막은 게 불과 4년 전이다.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촛불정부를 만든 시민들의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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