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목숨’ ‘식물의 밤’ 등을 펴낸 박진성 시인이 자신에 ‘상습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한국일보와 소속 기자를 상대로 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지난 18일 일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5민사부는 한국일보와 소속 기자가 박 시인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 액수(손해배상액)를 5000만 원으로 명시했다. 박 시인이 이번 소송에서 청구한 위자료는 1억 원이었다.

아울러 법원은 박 시인이 수년간 상습적으로 여성 습작생들에게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가했다는 주장을 담은 2016년 10월21일자 첫 보도(“문화계 왜 이러나… 이번엔 시인 상습 성추행 의혹”)를 포함해 한국일보 기사 4건, 관련한 한국일보 SNS 게시물 2건의 정정을 명했다.

한국일보가 쏟아낸 보도들

2016년 10월 보도된 한국일보 첫 기사에는 박 시인으로부터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을 당했다고 자처한 익명의 여성들이 알파벳으로(A, C, D, E, 기타) 등장한다. 이 사건 피고인 한국일보 ㅎ기자는 SNS상에서 나온 익명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을 전하는 형식으로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이 사건 법원 판결문을 보면 ㅎ기자는 첫 보도 전까지 기사에 등장하는 피해자 여성, 또 박 시인과 전화 또는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다. 현재 첫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희롱은 일부 인정하지만 성추행과 성폭행은 절대 한 적이 없다”는 박 시인 해명도 박 시인이 기사 출고 후 문제를 제기한 뒤 반영됐다. 법원은 박 시인의 성희롱 의혹도 인정하지 않았다.

▲ 한국일보 2016년 10월21일자 온라인 보도. 사진=한국일보 홈페이지
▲ 한국일보 2016년 10월21일자 온라인 보도. 사진=한국일보 홈페이지
ㅎ기자는 당시 박 시인 항의에 “나는 강간 여부를 판단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위치가 아니다. 제기된 의혹을 보도하고 거기에 대한 주변부 맥락까지 함께 이야기하는 게 내 역할”이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보도 파장은 컸다. 박 시인 시집을 출간했던 출판사는 2016년 첫 보도 직후 “2014년 5월 그의 세 번째 시집 ‘식물의 밤’을 출간한 출판사로서 피해자 분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며 참담한 마음으로 유감을 표명한다”는 내용으로 사고(社告)를 냈다. 박 시인도 첫 보도 다음날 “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박 시인에 대한 한국일보 보도는 이어졌다. ㅎ기자는 2016년 10월23일 후속기사를 통해 박 시인의 성폭력 의혹에 관한 내용을 다시 거론했다. 한국일보는 사설(2016년 10월24일자)에서 박 시인을 거론하며 “여성의 거처를 찾아가 만남을 강요하고 심지어 성관계까지 강제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런 증언이 사실이라면 일종의 범죄를 저지른 셈”이라고 썼다. 한국일보 대학생 인턴기자들은 ㅎ기자의 첫 보도를 포함한 내용을 ‘카드뉴스’로 제작하기도 했다.

박 시인은 재판에서 이러한 기사들이 “모두 익명의 여성들이 SNS 상에서 제기한 일방적인 주장에만 근거해 작성된 허위의 기사이거나 그 허위의 기사가 진실하다는 잘못된 전제 하에서 이뤄진 후속 기사와 사설”이라며 자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문단 권력을 이용한 파렴치한 성폭력범’으로 몰아 심대한 정신적 손해를 가하고 시인 활동도 사실상 할 수 없게 만드는 등 보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일보 측은 “피해자들이 사후 피해 사실을 번복한 것은 박진성의 보복이 두려워서이지 피해 진술이 허위이기 때문이 아니다”, “박진성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성들을 꾀어내 성적 접촉을 하는 부적절한 행동 패턴을 반복했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의 표현은 그런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시인의 고소 공방전

박 시인이 이 판결에 승소하기 앞서 박 시인과 피해자라고 주장한 이들 간 고소와 쟁송이 있었다. 이는 재판부 판단의 주요한 단서가 됐다.

한국일보 첫 기사에 등장하는 C씨는 지난해 5월 박 시인을 감금, 협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강간,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C씨는 수사 도중 감금, 협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에 대해선 고소를 취하했다. 대전지검은 지난해 9월 박 시인의 강간과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박 시인 역시 C씨가 자신을 강간, 강제추행 등으로 허위 고소했고, 트위터에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는 이유 등으로 C씨를 수사기관에 고소(무고 및 명예훼손 방조 혐의)했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범죄 혐의가 인정된다면서도 C씨가 초범이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점 등을 들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박 시인은 E씨에 대해서도 트위터에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기관에 고소했고 검찰은 지난해 6월 E씨의 범죄 혐의를 인정해 약식기소했다. E씨는 정식 재판을 청구했지만 박 시인이 지난해 12월 처벌 불원 의사가 담긴 고소 취하서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공소기각 판결이 선고됐다.

박 시인은 E씨를 상대로는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했다. 법원은 E씨가 “한국일보 기사에서는 제가 트위터에 게시한 내용을 인용해 박진성 시인이 저에게 성추행과 ‘강제적 성관계’를 행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해당 한국일보 기사는 저의 의사에 반해 보도된 것이다. 저는 저와 박진성 시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기사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내렸다. 양쪽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이 결정은 지난 2월 확정됐다.

이러한 사실관계와 각종 증거에 기초해 이번 재판부는 한국일보 보도들이 담고 있는 주요 사실 관계 요지(‘미성년자 여성을 성희롱했다’,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는 등 추행했다’, ‘자의적이지 않은 성관계를 했다’, ‘다리 벌린 사진을 보내라고 하고 거부하면 자해 운운했다’, ‘뒷풀이 자리에서 허벅지를 만졌다’, ‘죽고 싶다고 해 오게 한 뒤 강제적 성관계를 가졌다’, ‘박진성이 지명도를 이용해 여성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성폭행했다’ 등)를 허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시인이 사과문을 올린 것 역시 “다수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문단 내 성폭력’ 관련 폭로들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구체적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형식적인 사과문을 올린 것”이라며 “최초 기사에 적시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취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한국일보 2016년 10월24일자 사설.
▲ 한국일보 2016년 10월24일자 사설.
확인 취재 없는 한국일보 보도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피해 진술을 번복한 것이 박 시인이 보복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한국일보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C·E씨의 경우) 허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익명의 폭로를 했다가 그것이 한국일보 최초 기사를 통해 언론에 널리 확산되는 바람에 이를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까지 받게 됐고 수사기관에서도 폭로에 관해 마땅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했다”며 “일부 여성은 정서적으로 다소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박진성에 대한 폭로를 한 정황도 엿보이는 점 등에 비춰보면, 피해자라고 자처했던 익명 여성들이 실제 그런 피해를 겪었음에도 박진성의 보복 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이를 번복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시인과 C·E씨들의 성적 접촉에 대해선 “위 여성들은 박진성과의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고 자발적 의사에 기해 박진성과 여러 가지 성적 접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섣불리 ‘성추행’이나 ‘성폭행’으로 평가하기 어렵다”고 했다.

박 시인이 C·E씨와 일부 성적으로 적나라한 대화를 나눈 것 역시 “여성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박 시인이 이들을 성희롱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도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익명 여성들이 박 시인을 겨냥해 제기한 성폭력 의혹에 대해서도 “인정할 뚜렷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한국일보 측은 보도 일부가 허위일지라도 공익에 관한 것으로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ㅎ기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과 박 시인에 대해 전화 또는 대면 인터뷰를 실시하지 않은 사실에 무거운 책임을 물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이 사건 익명 여성들에 대한 직접 확인 취재는 끝내 하지 않았고 한국일보는 그런 상태에서 최초 기사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후속 기사, 사설 등 관련 보도를 스스로 확대재생산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익명 여성들에 직접 연락이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보도를 강행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 뒤 “게시글 자체가 완전히 허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문단 내 성폭력이 만연하고 피해 호소자 중에 미성년자가 끼어 있다는 사정만으로는 이 사건 익명 여성들에 대한 확인 취재를 모두 거르고 일단 그 내용을 옮겨 적다시피하는 방식으로 보도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부연했다.

성폭력 보도에서 주의해야 할 것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례적 액수인 ‘위자료 5000만 원’이 선고된 배경은 뭘까.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박진성은 그가 미성년자를 포함한 작가 지망생들을 상습적으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했다는 허위 사실을 담고 있는 한국일보 보도와 SNS 게시물로 인해 시인으로 활동해온 문단에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파렴치한 사람으로 인식돼 더 이상의 시작(詩作) 활동은 물론이고, 정상적 사회생활 자체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판부는 언론의 성폭력 관련 보도에 주의를 요구했다. 재판부는 “성폭력 관련 보도는 그 이슈 자체가 갖는 ‘폭발성’과 ‘휘발성’으로 인해 더욱 세심한 확인 취재가 필요한 것”이라며 “ㅎ기자와 기타 한국일보 소속 취재진들은 단순히 SNS에 폭로된 게시 글만을 취합하고, 그에 대한 추가 확인을 전혀 하지 아니한 채 마치 그 내용이 사실일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처럼 보도해 박진성의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일보와 기자가 박진성의 극구 부인에도 추가 취재에 나서기보다는 허위 사실을 전제로 한 후속 보도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스스로 이중, 삼중의 가해를 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다만 재판부는 박 시인에도 “익명 여성들이 SNS를 통해 손쉬운 공격 대상으로 삼기 좋은 환경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유명 작가로서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처신을 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선고된 위자료 액수가 5000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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