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문재인 정부 출범 나흘 뒤에 화성 12형 미사일을 발사했고 연이어 한 달 동안 4차례에 걸쳐 중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형과 지대공 요격 유도 무기 체계, 지대함 탄도 미사일, 순항미사일을 차례로 쐈다. 8월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를 언급했고 다음날 북한은 괌 해상 포위 타격 계획을 내놓았다. 8월 전쟁 위기설을 넘어 9월엔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있었다. 휴전 협정 이후 최대의 안보위기에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건 말 그대로 기적이다.

문정인 연세대학교 특임교수와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개월에 걸쳐 급변하는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진단, 조망하는 대담을 10차례 진행하고 책 <평화의 규칙>으로 묶어냈다.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극적으로 변한 상황만큼, 대담의 사회를 맡았던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의 질문도 변해갔다. 김 국장은 2000년 통일 전문 인터넷미디어 <통일뉴스> 창간 이래 남북 해외 공동행사와 6자 회담, 남북 대화 등을 취재해왔으며, 현재는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다. 지난 6일 삼청동 한 전통찻집에서 김 국장을 만나 지난 18년 동안 통일외교안보 현장취재 이야기를 들었다.

-방북 취재 횟수는?

“평양 취재만 8번 갔다. 개성, 금강산 다 더하면 스무 번쯤?”

-18년 통일 전문기자여서 책 몇 권 썼을 줄 알았는데 이번 책이 처음이더라.

“저는 기본적으로 일선기자다. 기고나 강연, 집필을 안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번 경우도 제가 코디만 해주기로 했다가 나중엔 사회까지 보게 됐다. 정리는 출판사에서 했다. 기자는 기사로 얘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이 7월 4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평화의 규칙></div></div>
                                <figcaption>▲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이 7월 4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평화의 규칙>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fig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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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br><p></p><p>-통일뉴스는 어떻게 시작했나?</p><p>“2000년 무렵 생겨났다. 통일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라 우리라도 해야겠다고 나섰는데 갑자기 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거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며 인터넷 매체도 정부 부처를 출입할 자격을 얻었다. 효순, 미선이 미군 장갑차 압사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를 인터넷 매체가 적극 조명했고 그 때 길거리에서 이들의 연대인 한국인터넷기자협회가 결성됐다.”</p><p>-지난 보수정권 9년 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p><p>“2008년에 통일부 출입했는데 대변인이 1일 브리핑할 때마다 ‘햇볕정책이 바뀌면 안 된다’는 기조로 매번 치열하게 싸우고 따졌는데 1년 쯤 후에는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부턴 명맥 유지만 겨우 해왔다. 후배들이 나가도 충원할 수 없었다. 14명이었던 기자가 현재 6명까지 줄었다.”</p><p>-남북, 북미관계를 전망하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p><p>“통일뉴스 초기 부족한 전문성을 채우기 위해 맨 처음 모신 상임고문이 남북문제 국내 최고 전문가인 김남식 선생이었다. 그런 분도 어쩌다 한 번 자신의 분석이 맞으면, ‘다행’라고 말하실 뿐이더라. 남북, 북미관계는 생물이며 가변성이 많아서 누가 전문가라며 예언하고 그럴 문제가 아니다. 통일외교안보 특종은, 하기도 어렵지만 하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아는 것도 기사로 못 쓰는 경우도 많고.”</p><p>-<조선일보>가 최초로 북한 마약거래의 현장을 동영상에 담았다고 했던 다큐 ‘천국의 국경을 넘다(2008)’의 장면이 사실은 ‘미원’가루 연출이었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했는데?</p><p>“당시 신문의 한계를 느낀 조선일보가 멀티미디어로 방향을 잡고 다큐 팀을 만들어 조중 접경지역에서 탈북자 관련 작품들을 만들었고 그 대표작이 <천국의 국경을 넘다>였다. 북한에서 한 청년이 밤에 강을 헤엄쳐와 그 사람과 전격 인터뷰 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뭍에 올라와 입에서 뭔가를 뱉어내며 ‘이게 뺑굽(마약)이다’라고 하는 장면을 찍었으니 어마어마한 특종이 된 거다. 국제상을 13갠가 휩쓸었다. 다큐팀 촬영을 도와준 조선족 코디네이터의 여동생이 2009년 4월 ‘신문의날’ 시상식장에 ‘우리 오빠가 억울하다’는 호소문을 들고 나타났다. 그 코디네이터가 언론도 코디해주고 탈북자 브로커 그런 일 하다가 문제가 생겼고 조선일보 촬영 도와 준 것도 문제가 됐는데 조선이 그를 안 도와주고 방치한거다. 오래동안 탈북자 문제를 취재했던 조천현 PD가 내게 현지 동반 취재를 제안했다. 중국 가서 코디도 만나고 그 사건을 취급했던 중국 공안담당자도 만나는 등 복수취재원의 확인을 거쳐 조선일보가 제시한 마약이라는 게 사실은 미원가루였다는 것을 단독 보도했다. 보도 후에 조선 담당기자로부터 항의전화가 왔다. 나는 이의가 있다면 언론중재위에 제소하던 법적으로 문제제기하라고 했다. 결국 조선일보 측에선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1등신문이니 어쩌니 하지만 취재 과정과 이후 대응을 보면 대단히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p><p>-북한기사 팩트체크 전문가인 셈인데 또 다른 기사는?</p><p>“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인터뷰가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8년 10월호에서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요원이라고 주장하는 탈북자 장철현의 명의로, 자진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오익제는 통전부에 납치당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는 통일뉴스가 북측 조선6·15편집사(우리민족끼리 사이트 운영)와 계약을 맺고 민간교류를 하던 때였고 편집사 초청으로 단독 방북취재를 하고 있었다. 취재 아이템의 하나로 오익제 인터뷰를 북에 제안했지만 관례적으로 봤을 때 불허되지 않을까했는데 인터뷰가 성사됐다. 당사자의 입으로 납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독보도 했다.”</p><p></p><div style=
▲ 평양에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위 오른쪽)을 인터뷰 중인 김치관 기자(노트북 컴퓨터를 쓰는 이)  사진=김치관 기자 제공
▲ 2008년 12월 1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위 오른쪽)을 인터뷰 중인 김치관 기자(노트북 컴퓨터를 쓰는 이) 사진=김치관 기자 제공


-북한 관련 아님 말고식 보도는 지금까지도 문제다.

“많은 언론들이 현송월이 처형당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녀는 살아서 방남했다. 하지만 그걸 보도했던 거의 모든 매체가 바로 잡지 않았다. 참 철면피한 행태며 언론의 기본자세가 안 된 거다. 1995년에 <평화통일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보도·제작준칙> 만들었지만 지키지 않고 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에서 북측에 남북언론중재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합의 된다면 앞으로 남과 북에서 나오는 오보를 위원회가 검증할 수 있지 않을까.”

-남북정상회담 취재하면서 느꼈던 청와대 기자단 개선할 점은?

“킨텍스에서 취재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기자단 내부의 공평한 룰 적용 문제다. 청와대 출입기자 풀단에 저는 들어있지 않다. 현재는 정부출입처의 70~80% 커버하는 매체만 풀에 들어간다. 그것도 관행이므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돌아가면서 하면 되는데 순번 중에 통일외교안보 순번에는 저도 들고 싶다.  내 경우, 앞으로도 정상회담이 10번 열린대도 지금 같은 구조라면 풀 취재단에 못 들어가는 이런 현실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정부가 홍보예산을 어떻게 집행할 것인가에 대한 구조적 대안이 나와야 한다. 청와대가 언론사에 쓰는 홍보예산의 단 0.001%도 통일뉴스는 받지 못한다. 작은 언론사에도 공정하게 적용해야 한다.”

-북한에서 제일 유명한 기자 중 한명이라는 말이 있더라.

“북측은 일명 '스피커'라고 남측 기자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 나는 그런 거에 상관없이 질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불쑥 멘트를 요청해야하니까 항상 어렵다. 창원에서 노동자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스무살 짜리 북한 선수가 첫 골을 넣었다. 멘트를 따려고 했는데 그 선수는 인터뷰 미션이 없어서 슬슬 피했다. 계속 시도하니까 보장성원(북측 안내원)들이 와서 '김선생 다 아시면서 왜 그러셔. 단장하고 하시오' 했다. 결국 못했는데 다음 경기에서 또 그 선수가 골을 넣었다. 또 인터뷰 시도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2박3일 쫓아다녀 겨우 마지막 만찬장에서 그 선수 멘트 하나 받아서 통일뉴스가 유일하게 보도했다.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골 넣어서 좋고 남북 화합’이런 건데. 그거 하나 하느라고 나는 몇 번 북한사람들과 싸우고... 북쪽 입장에서 제일 골치 아픈 기자가 나일거다. 나도 힘들다.(웃음)”

▲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가운데)이 2007년 평양에서 열린 6.15남북공동행사를 취재하고 있다. 사진=김치관 기자 제공
▲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가운데)이 2007년 평양에서 열린 6.15남북공동행사를 취재하고 있다. 사진=김치관 기자 제공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남북 관계에 남긴 가장 큰 잘못은?

“남북관계를 진전시킨 게 아니라 근원적으로 후퇴, 파괴시켰다. 노무현 정부 끝나고 햇볕정책의 근원적인 틀은 허물지 못할 거라고 남쪽 민간이나 진보 진영, 북쪽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판단 미스였다. 그걸 책임지고 북한에서는 최승철이 옷을 벗었다.”

-정부 관련부처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은 없나

“통일부 출입할 때도 북한 원문을 많이 보도했다. 조평통 성명 이런 걸 전문을 다 실어 보도하면 대북, 정보관계 당국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며 주변을 통해 경고를 보내곤 했다. 나는 통일부를 공식적인 루트로 생각하기 때문에 국정원 사람들은 안 만난다.”

-이산가족 상봉이 8월 21일 예정돼 있는데?

“남북 모두가 눈앞에서 가라앉아 가는 세월호를 70년 내내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모두 죄인이다. 분단돼서 부모자식이 헤어져 있는데 금 그어 놓고 못 건너게 하는 사이에 다 늙어 죽어간다. 그러다 금강산에서 2박3일, 3박4일 단체·개인상봉하고 마지막날 작별인사를 하면 영원히 못 만난다. 100명씩만 골라서 만나고 헤어지는 걸 우리 사회가 다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조만간 다시 열리지 않을까?

“당연히 아니다. 교류와 접촉은 제일 마지막에 될 거다. 금강산 관광 다녀온 사람들 말은 딱 세 마디로 정리된다. ‘와~ 금강산 경치 좋더라, 현대가 대단한 일 했더라, 북한 사람들 만나보니 우리랑 똑같더라.’ 통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인적 접촉, 교류를 제일 두려워한다. 미국이 봤을 때 남북 문제는 사람이 만나면 끝이다.”

-칼858기 기사를 계속 쓰는 이유는?

“한반도에 냉전을 자리 잡게 한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는데 하나가 칼858기 사건이고. 두 번째가 천안함 사건이다. 칼858 사건은 유엔에 가져갔는데 김현희 증언 외에 결정적 물증이 없어서 규탄 결의안을 못 냈다. 그래서 미국이 독자제재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써 국제적 고립이 시작됐다. 그 다음이 천안함 사건인데 유엔으로 규탄결의안 가져갔는데 결정적 증거라는 1번 어뢰가 북한 것이라는 게 입증이 안돼서 채택 안 됐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독자제재로 5.24 조치를 했고 보수 정권동안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됐다. 이 두 사안은 우리 현대사에 냉전을 고착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반드시 의혹을 풀어야한다.”

-18년 동안 통일외교안보 분야 취재하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직전인 6자회담 4차 회담 때다. 6자 회담 때마다 매번 현장에서 한미일 3국 수석이 별도 회동을 해왔다. 한국기자는 나만 취재갔다. 식사가 끝날 때쯤 이례적으로 한국대표단만 먼저 빠져 나갔다. 뭔가 의견차가 있어서 한국이 보이콧한 건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송민순 대표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미일 3국 수석이 나란히 웃으며 사진을 찍어서 ‘나는 미국편이다’라고 인식되고 싶지 않아서 먼저 빠져나온 거였다. 그런 점에서 송민순을 높이 평가하며 ‘사진 안 찍은 송민순’이라는 칼럼을 썼다. 1년이 넘어서 간신히 회담 열렸고 역시 한미일 3자회담 했는데 천영우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번엔 ‘사진 안 찍은 송민순과 사진 찍은 천영우’라는 칼럼을 썼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김숙이 6자회담 수석이 됐다. 김 수석이 기자단에게 밥을 샀는데 헤드테이블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당신은 6자회담장 오기도 전에 이미 두 차례나 한미일 3자회동을 하고 왔다며 비아냥댔더니 그가 나를 딱 정면으로 째려보면서 ‘정권이 바뀌었잖아!’ 라고 소리치더라. 그래서 또 썼다. ‘송민순 천영우 그리고 김숙’”

-흥미진진하다. 그 이후 얘기도 궁금하다.

“그후에 북한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비밀 방남하고 김숙 국정원 1차장이 비밀 방북했고 류경이 그 사안으로 처형당했다는 단독보도를 했다. 김숙은 국정원 1차장 마치고 보직이 없어서 어디 대사 나가려고 대우빌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기사를 써서 찾아가 보여주며 당신 입장은 뭐냐고 했더니 자신은 국정원에서 근무한 21개월여의 기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맞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기겁을 했다. 단독 특종이었다. 나중에 이명박이 자서전에 류경과 김숙이 오갔으며 류경이 처형됐다는 것까지 썼다. 2차 남북정상회담까지 끝난 뒤인데 남북 정보기관 실세가 평양과 서울을 오갔고 그걸로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은 현대사에 드문 일이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왜 우리사회가 분단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회에 헌신했던 그 많은 386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더딜까 라는 고민속에서 민족주의를 재조명해보고 있다. 그 속에서 동학, 국학, 천도교와 대종교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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