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시간 가까이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드라마현장에 조명을 밝히는 짬짬이,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형편없는 페이(돈)를 받고 하루에 수십 통 섭외전화를 돌리고 아이템을 찾는 와중에, 카메라, 삼각대, 백업컴퓨터, 드론까지 혼자 짊어지고 출장길에 나서는 공항에서 노조 설립에 응원의 댓글을 달고 노조가입서를 보내준 모든 방송스태프 노동자의 관심과 열의가 모아져 만들어졌다.”

방송스태프노조준비위원회가 1년여 만에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지부장 김두영)로 깃발을 올렸다. 방송스태프지부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위원장 선출, 사업계획 발표 등 첫 안건을 논의했다. 창립 총회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준비위원장을 맡아온 발전차 스태프 김두영 지부장과, 곽헌상 사무국장을 선출했다.

김두영 초대 지부장은 “(방송 스태프들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과도한 노동에 정당한 보상도 없이 열정만으로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참고 감내해왔다. 방송스태프지부는 몇몇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노조 설립에 응원 댓글을 달고, 노조가입서를 보내준 모든 방송스태프 노동자의 관심과 열의가 모아져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방송스태프지부 출범에는 약 1000명의 방송 스태프 노동자들이 동참했다. 지난 2~3년 동안 제작 현장 곳곳에서 스스로 노동권을 쟁취해나가자는 움직임이 모인 결과다. 지난 2016년 말 SNS 활동으로 시작된 한국방송드라마스탭협회, 지난해 고(故) 박환성, 김광일 PD가 촬영 중 사망한 뒤 발족한 독립PD노조설립추진위원회, 방송계갑질119 등 지난 수년 간 방송제작현장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방송스태프지부 출범 원동력이 됐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오수 희망연대노조 조직국장은 “오늘을 기점으로 여러분 목소리가 조명되고 취재되고 기사화되고 있다. 이제 (방송에)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연대 발언에 나선 김진규 희망연대노조 공동위원장도 “노조를 설립한 오늘이 절반의 성공이다. 시작이 반이란 생각으로 동료들을 모아 우리 존재를 알리고 노동자가 존중되는 환경을 만들어나가자”고 격려했다.

▲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창립총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창립총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창립 행사에는 다양한 방송 유관 단체들이 참석해 응원을 보냈다. 오정훈 전국언론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공영방송 총파업 투쟁에 여러분 지원이 없었다면 부도덕한 사장을 몰아내지 못했을 거라 생각된다. 여러분의 노고와 희생에 감사 말씀 먼저 드린다. 많은 불신과 오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지만 우리 길은 하나다, 같은 언론 노동자로서 그야말로 우리가 가진 권리와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투쟁에 함께 해나가겠다”고 전했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영화나 방송 뒤에 노동자들은 굉장히 오랜 시간 철저히 가려져있었다”며 “7월부터 근로시간 제한이 닥쳤는데 꼼수만 늘어나는 것 같다. 영화건 방송이건 근로계약이 상식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희망연대노조 딜라이브지부, 티브로드지부,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와 언론개혁시민연대,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연대를 밝혔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도 축사를 보냈다.

방송계갑질119 스태프로 활동하고 있는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 상임집행위원은 “노조를 만들면 회사와 싸우고 제작사, 방송사와도 싸워야 하는데 진짜 싸울 두 가지가 있다”며 ‘무기력’과 ‘관행’을 꼽았다. 방송계갑질119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점이 ‘그래봐야 안 변한다’라는 반응이었고, 방송사나 스태프들이 ‘관행’이라는 말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스태프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고 집단의 힘으로 이겨나가는 가능성을 만들었다고 믿는다”고 응원했다.

조혜승 스태프노조 준비위원은 “우리의 무기력은 다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처음 일 시작할 때는 나도 제작사 정직원이었고 카메라맨, PD 함께 선후배로 정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점점 모든 사람들을 프리랜서화하면서 개개인으로 흩어졌다”며 “그 구조 속에서 일하고, 고용되고, 또 잘리는 동안 나는 약한 혼자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졌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어 “여러분이 도와주실 거란 믿음으로 현장에서 조합원 분들을 만나면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깨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재 지상파를 포함한 대부분 방송사들은 방송제작 영역 대부분을 외주에 의존한다. 연출·미술·조명·촬영·음향·장비 등 90% 이상이 외주화 돼 있다. 이는 곧 방송제작 현장 노동자의 90% 가까운 이들이 산업재해 보험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위험한 노동환경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단순 비정규직 뿐 아니라, 파견·하청업체 소속, 프리랜서, 강요된 개인사업자 등으로 얽혀있는 고용구조도 노동권 보장을 가로막고 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최소한의 권리’로 △살인적인 초과노동 중단과 노동시간 단축 △정당한 임금과 초과 노동수당 지급 △점심시간·휴게시간 보장과 안정적인 식사 제공 △하루 8시간 수면권 보장 △야간촬영 종료 시 교통비·숙박비 지급 △불공정한 도급계약 관행 타파와 노동인권 존중 △근로시간과 적정 임금 명기된 근로계약서 작성 △모든 스태프들에 대한 차별금지와 인권 존중 등을 요구하고 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이달부터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주도적으로 대응하고 언론노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과 협력한다는 계획이다. 지부는 노조 활동을 알리려고 새벽 시간 방송스태프들이 제작 현장으로 출발하는 여의도역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방송사가 밀집한 상암동, 여의도, 목동 등에서 설명회를 연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