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살짝 꺾으면 파리 패션의 상징, 샤넬 매장이 나온다.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은 프랑스의 패션 리더였지만 프랑스다운 화려함은 1도 없었다. 샤넬이 고안한 향수병과 알파펫 ‘C’를 맞물린 로고는 어떤 기교도 거부한 단순함의 극치다. 색깔조차 흑백이다.

▲ 샤넬 로고
▲ 샤넬 로고

샤넬은 ‘봄의 욕망’, ‘저녁의 도취’ 같은 당시 유행하던 야릇한 이름조차 버리고 그냥 자기 이름 ‘샤넬’에 번호만 매겨 향수를 만들었다. 이렇게 1920년에 만든 다섯 번째 향수 ‘샤넬 NO.5’는 대박을 쳤다. 샤넬은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든 내용물에 주목했다.

▲ ‘샤넬 No.5’ 향수
▲ ‘샤넬 No.5’ 향수
허풍쟁이에 가는 곳마다 여자를 임신시키고 달아났던 볼품없는 떠돌이 장사치 아버지와 목수의 딸로 태어나 고아로 자라 억척스러웠던 어머니 때문에 샤넬은 평생 집안 얘기만 나오면 늘 거짓말로 둘러댔다. 가난을 안고 태어난 샤넬은 12살에 어머니가 죽자 물랭에 있는 오바진 고아원에 맡겨져 7년을 수도사처럼 살았다. 이후에도 수녀가 운영하는 인근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시골사람답게 가난했지만 고집 세고 생존력 강했던 샤넬에겐 어떤 귀족적 취향도 없었다. 샤넬이 1차 대전 때 만든 간호복은 초라한 농부의 작업복에 영감을 얻었다. 그만큼 단순하고 깔끔한 걸 좋아했다. 샤넬이 추구한 건 오로지 ‘기능’이었다.

샤넬의 바느질 솜씨는 초라한 어린 시절 직조공이나 모자, 양초, 못을 만드는 수공업자 틈에서 보낸 시골생활에서 자연스레 길러졌다. 샤넬 스타일은 선원과 마부의 작업복에서 나왔다.

샤넬은 평생 수많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88살에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다. 샤넬이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는 영국인 아서 카펠이었다. 아서는 탄광 유산으로 이미 30대에 재벌이었다. 아서는 샤넬에게 파리의 작업실을 열어 줄 정도로 깊이 사귀었지만 정치적 출세하려고 귀족 출신 여자와 결혼했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봄 샤넬은 300명의 봉재공을 거느린 의상실 사장이 됐다. 샤넬 여성복은 일대 유행을 만들었다. 화려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디자인에 활동하기 편해서다. 프랑스 언론은 샤넬의 드레스에 침묵했지만 미국 언론은 환호했다.

사회주의 화가 피카소는 1920년대초 며칠씩 샤넬의 집에 묵었다. 1922년 몽마르트 극장에서 33살의 장 콕토가 각색하고, 41살의 피카소가 무대장치를 그리고, 39살의 샤넬이 만든 옷을 입은 배우들이 나오는 도발적 연극 ‘안티고네’가 관객을 만났다.

반대로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샤넬은 괴벨스의 부하였던 하노버 출신 시골 귀족과 사귀었다. 전쟁이 끝나고 드골 정부는 독일 점령기간에 독일인과 사랑을 나눈 여자들을 공개처벌했다. 샤넬도 체포됐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급히 프랑스 정부에 전화해 샤넬의 처형을 막았다.

▲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
▲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
8년의 미국 망명 끝에 1953년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프랑스 언론의 싸늘한 시선 속에 이듬해 1954년부터 1971년 죽을 때까지 작업실과 리츠 호텔을 오가며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샤넬은 88살에 혼자 죽었다.

네이버에서 ‘코코 샤넬’을 치면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이 뜬다. 뭐든 유행만 하면 따라가는 청담동과 가는 곳마다 귀족문화에 맞섰던 샤넬이 어떻게 연관어로 검색되는지 모를 일이다. ‘샤넬’하면 화려함을 떠올리지만 정작 샤넬은 밑바닥 서민의 일상에서 패션을 길어 올렸다. ‘실용 보다 더 좋은 패션은 없다’고 했던 샤넬처럼 우리 언론도 실사구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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