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대응 방안 없이 주 68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7월을 맞았다. 노동시간 특례 업종에서 방송업이 제외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지상파 중 노사 합의를 이룬 방송사는 단 한 곳도 없다. 방송사마다 부서가 자체 노동시간 단축방안을 시행하는 가운데, 초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드라마나 예능을 중심으로 사실상 ‘위법’ 상태가 이어질 전망이다.

노조는 방송사가 계도기간을 믿고 늑장을 부렸다고 비판한다. 정부가 최근 노동시간 단축 연착륙을 명목으로 6개월 처벌 유예기간을 주자 방송사들이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것.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와 MBC본부가 사측이 협상안 자체를 내놓지 않았다고 밝힌 가운데, SBS본부는 본사가 법적 시한을 불과 십여 일 앞두고 부실한 협상안을 내놨다고 지적했다.

전국언론노조(위원장 김환균)도 지난달 29일 성명을 내고 “사측 협상자 얼굴에선 이제 긴장감조차 찾기 어렵다. 오늘 하지 않으면 우리의 동료, 후배 그리고 아이들이 내일 다시 최장 노동의 전쟁터로 내몰린다”고 우려했다.

방송사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각 부서 자율에 맡기고 있다. 지상파 3사 보도국은 7월을 기점으로 아침 편집회의 시간을 오전 10시로 연기해 출근이나 업무 준비시간을 오전 9시로 맞추기로 했다. 조근자는 저녁 뉴스 제작에 참여하지 않고, 야근자는 오후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에 바로 퇴근하도록 조정했다.

초과 근로가 발생한 주에 대체 휴가를 소진하도록 하는 식으로 주당 2일 휴식을 보장하면 주 68시간 준수까지는 크게 무리가 없다는 분위기다. 다만 MBC 보도국은 출입처별 기자 인원이 부족해 뉴스 제작에서 배제하는 인원을 두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강제력 없는 자율 관리만으로는 실질 노동시간 준수가 어렵다는 우려도 있다. 휴가를 권장하면서도 무분별하게 업무를 지시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 한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다. 방송사 주 68시간제 시행 첫날인 지난 1일 한 종합편성채널 소속 기자는 휴가를 간 상황에서 부장 지시로 뉴스 제작에 참여했다. 해당 부장은 “본인이 경험을 쌓고자 희망해서 휴가를 연기하고 가게 됐다”고 밝혔지만 내부에서는 “휴가 중인 기자에게 막무가내로 일 시키는데 68시간이며 52시간이며 지켜질 것 같지 않다”는 냉소가 나왔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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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예능 부문은 사정이 더 안 좋다. 특히 ‘주 7일 100시간’ 노동을 기반으로 매주 방영분을 내보내는 드라마는 제작 중인 현장이 갑자기 변화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현장 스태프들에 따르면 새벽 3시에 촬영이 끝나 아침 7시에 다시 촬영 현장으로 떠나는 20시간 이상 스케줄이 유지되는 현장이 상당수다. 한국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에는 7월 이후 초장시간 노동을 호소하는 신고가 이미 여러 건 접수된 상태다.

제작시간 단축을 추구하는 현장에서도 이른바 ‘쪽 대본’으로 인한 장시간 촬영 가능성이 여전하다. MBC 토요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연출자인 김민식 PD는 “가급적 심야촬영을 자제하고, 밤 장면을 촬영하면 다음날 출발 시간을 늦추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반 이후 대본이 나오는 대로 받아서 찍어야 하는 게 걱정”이라고 밝혔다. 김 PD는 “68시간도 준수하지 못하면 52시간은 불가능하다”며 “법적 테두리 내에서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면 드라마 제작 자체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사전제작을 비롯해 드라마 제작 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방송사는 드라마가 편성 및 광고 수익과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최근 지상파3사는 드라마 제작 시간 단축 일환으로 평일 미니시리즈와 주말극 분량을 회당 67분에서 60분으로 줄이는 데 합의했다. 60분은 유사 중간 광고(PCM·Premium Commercial Message)가 가능한 마지노선이다. 정영하 MBC 정책기획부장은 “11월 이후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부터는 제작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촬영과 제작이 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예능 역시 마찬가지다. KBS의 한 예능PD는 “법 취지에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예능 프로그램 제작은 기획 단계부터 섭외와 제작, 편집, 자막, 후반 작업 등 모든 과정에 머리를 짜내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간제한을 둔다는 것 자체가 가혹하다”고 말했다. 주말의 경우 2일 동안 16시간 근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말 근무가 일상화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전했다.

또 다른 PD는 전반적인 판이 바뀌지 않으면 제작 환경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하려고 하니 당연히 못한다는 것 아니겠느냐”며 “사람을 더 뽑고 제작 방식을 바꿔서 시간을 꼭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오훈 KBS 혁신추진부장은 “현장 요구는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방향이다. 수시나 신규 채용을 앞당기거나 늘리는 방향으로 인사 관련 부서에서 준비하고 있다”며 “예능의 경우 경력 채용이 추진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지상파는 계도기간 취지를 살려 내년 주 52시간 안착이 가능한 방법을 찾겠다는 방침이지만, 언론노조는 현상유지가 이어지는 데 강한 우려를 보내고 있다. 최정기 언론노조 정책국장은 “각 사별 대책은 전반적으로 무성의하고 안일하다. 1년을 줘도 대책이 안 나올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주요 제작현장 노동 환경 개선이 늦어지면 현장 스태프 등 비정규직들의 변화는 더 늦어질 수밖에 없다”며 “지금까지는 현실을 감안해 대화로 풀어보려는 기조였지만 이제는 전환점이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

산별교섭을 진행 중인 지상파 대표단과 언론노조는 4일 오전 긴급 연석회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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