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허스토리’ 세부 내용이 있습니다.

히스토리(History)가 아니라 허스토리(Herstory)다.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엔 김희애·김해숙·예수정·문숙 등 여성 배우들이 주요 사건을 이끌었다. 소송을 지원하는 기업가,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피해자 모두 여성이다. 남성 배우는 변호사 등 한정된 역할에 머문다. ‘워킹맘’을 그리는 방식도 자식에게 죄책감을 드러내기 보단 “난 일이 좋다”고 딸에게 고백하며 자신을 긍정한다.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이 1992년부터 6년간 23차례 일본을 오가며 일본 정부와 소송한 ‘관부재판’(關釜裁判)을 소재로 했다. 시모노세키를 뜻하는 하‘관’과 ‘부’산을 오갔다고 해서 관부재판인데 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1심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패소했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부 승소했다.

▲ 영화 ‘허스토리’ 예고편 화면 갈무리
▲ 영화 ‘허스토리’ 예고편 화면 갈무리

관부재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지방법원 재판부가 숙연해질 만큼 절절한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었고 결국 1심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부 승소했다. 물론 근로정신대 피해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일본 정부는 1심에 불복했고, 이후 결과가 뒤집혔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얼마 전 위안부를 다룬 영화 ‘아이캔스피크’(감독 김현석)와 비교하면 훨씬 담백하다. 아이캔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의 특정 이미지를 주인공인 나문희에게 입혀 관객들이 감정이입하게 만들었다. 피해자 주인공 한명에게 집중하면 극적 효과가 커지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잘 만든 영화로 328만 명의 누적관객수를 기록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마다 다른 스토리를 보여준다. 위안부가 하나의 캐릭터로 단순화할 수 없고 개개인의 역사가 있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위안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린시절 회상 장면도 넣지 않았다. 눈물을 뽑아내는 장치를 자제한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대신 담담하게 법정 투쟁을 위주로 그렸다.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법정 드라마다.

▲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주목할 부분은 영화에서 김희애가 맡은 문정숙의 실제모델인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장의 역할이다. 실제 김 회장은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사업가였고 부산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 회장은 사비를 털어 피해자들의 소송을 돕고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만들어 당시를 기록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김희애(문정숙 분)의 눈으로 사건을 보도록 했다. 평범한 속물의 삶을 살던 이가 양심에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에 관객들이 감정이입하게 된다. 때론 위안부 피해자에게 매몰찬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끝까지 원고들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에 관객이 공감하게 된다.

동시에 존경받는 부자의 모습을 만든다. 실제 김 회장은 20억 원 넘는 사비를 털어 소송을 지원했고 현재는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당시 재판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 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용녀(이옥주 역), 예수정(박순녀 역), 문숙(서귀순 역), 김해숙(배정길 역), 김희애(문정숙 역)
▲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이용녀(이옥주 역), 예수정(박순녀 역), 문숙(서귀순 역), 김해숙(배정길 역), 김희애(문정숙 역)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를 중심으로 그렸지만 그럼에도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분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과거 한국사회에선 일본군 성노예로 인권이 침해된 위안부와 일제의 여자정신대근무령 등으로 여성들이 끌려가 군수·방직 공장 등에서 노동착취당한 근로정신대를 구분하지 못했다. 위안부·근로정신대 모두 인권을 침해받은 이들이라 소송에 함께 참여했다.

한편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해당 소송을 돕기 위해 힘쓴 이는 더 있다. 관부재판은 1·2·3차에 걸쳐 원고를 모집해 함께 싸웠는데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장은 관부재판에 2차로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씨, 3차로 근로정신대 양금덕씨 등이 합류하는데 도움을 줬다. 이순덕씨는 지난해 4월 10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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