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뒤부터 겉모습을 잘 꾸미고 말 잘하는 것을 잘난 것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대부분 추천돼 등용됐다. 때문에 모두 겉모습을 가다듬고 잘난 척 뻐기면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으로 조정의 풍습이 달라졌다. 이렇게 되자 임금도 그 폐단을 알고서 간혹 중후한 사람을 등용해 이런 폐단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둔하고 용렬한 무리들이 이런 구실로 조정에 많이 나왔으니 인재 등용의 어려움을 여기서 알 수가 있다.” 1733년(영조 9년) 2월24일자 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논평이다.
영조는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긴 52년이라는 세월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추진해 정국을 안정시켰다. 숙종 말 세자(경종)는 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왕자 연잉군(영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신하들이 군주가 될 만한 왕자들을 가려서 지지하는 웃지 못할 상황으로 왕을 비롯한 왕실의 권위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었다. 결국 영조는 왕세제(王世弟) 시절 자신과 반대파였던 남인과 과격파 소론의 공격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즉위한 지 4년 만에 무신난(이인좌의 난)을 겪었다. 상대 당에 대한 정쟁이 살육을 동반한 보복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정권쟁탈을 몸소 체험했다. 때문에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노론 강경파를 물리치면서까지 반대당 소론계 인사를 등용해 정국의 안정을 이뤘다.
인사제도에선 더욱 그러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에 노론을 임명하면 그 아래 참판에는 소론을, 또 그 아래에 참의와 낭관에는 노론과 소론 또는 남인까지도 임명해 한 붕당의 일방 주도를 견제했다. 이런 인사제도를 양쪽 인물을 동시에 임명하여 서로 대비케 한다고 해서 ‘쌍거 호대(雙擧互對)’라고 하는데, 오늘날 연정(聯政)의 한 형태였다. 이를 통해 등용된 인사들이 탕평파로서 국정의 실무진이었으니, 요즘말로 중도실용의 인사정책이다.
속대전과 속오례의 편찬과 같은 법과 의례제도의 정비, 정쟁의 빌미가 됐던 이조전랑의 특권 폐지, 압슬형 폐지와 사형수 삼복법(세 번의 심사) 실시와 같은 형정의 정비, 신문고 부활, 개천 준설, 민생의 가장 큰 부담이었던 군포를 줄여 균일하게 1필(疋)로 부과하는 균역법 완성 등 영조의 치적은 눈부셨다. 민생 위주의 정책 성과는 영조를 중심으로 중도 실용의 탕평파 인사들이 이룬 정국 안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탕평파가 담당했던 일련의 정책은 국왕 영조의 정치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지만, ‘탕평파’라는 또 하나의 파벌이 생기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 형제와 송인명(宋寅明) 등이 있었다. 모두 노론과 소론을 아우르는 인사들로 영조가 탕평을 추진하던 초·중기까지 주역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조정 내 인사를 좌우하면서부터 조씨와 송씨의 탕평천하라는 ‘조·송건곤(趙宋乾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개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뜬구름 같은 구호만 외쳐대며 말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장관으로 탁월한 행정 장악력은 물론이고 국민이 납득하고 동의할 만한 정책과 비전의 제시, 야당도 포용할 중도실용의 능력을 갖춘 인사가 필요한 때다. 정책을 논의하고 구현할 실체는 바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