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사내 성평등 기구 출범을 앞두고 소수의 간부급 인사들이 성평등 기구가 ‘사생활 보복’ 기구라는 주장을 펴 반발을 사고 있다. 이런 ‘발목잡기’가 성평등기구 추진에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KBS는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이경호·새노조) 양성평등국, KBS여성협회 등과 성평등센터(가칭) 출범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KBS는 사내 불공정 사례조사 기구인 ‘진실과 미래위원회’(이하 진미위) 산하에 성평등소위를 둘 계획이었으나, 별도기구가 필요하다는 KBS 이사회 의견을 받아들여 전담기구 신설을 결정했다. 6월쯤 예상됐던 출범시기는 7월 중순 이후로 전망된다.

성평등 기구는 양승동 KBS 사장이 취임 전부터 강조해 온 주요 공약이다. 양승동 사장은 지난 4월 취임식에서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성평등 문제는 처벌 수위를 확실히 높여 놓겠다. 절대 쉬쉬하며 넘어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양 사장을 제외한 KBS 사장 후보자도 모두 사내 성폭력 처벌 강화와 성평등 인식 확립을 위한 조치를 약속했다.

KBS 여성협회도 꾸준히 성평등 전담기구를 요구해왔다. 이른바 ‘미투’ 운동이 확산된 올 초, 2012년 백아무개 기자의 강제추행 의혹과 2014년 최아무개 카메라 기자의 성추행 논란 등 KBS에서 벌어진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다. 피해자는 모두 비정규직 여성이었다. 여성협회는 사내 실태조사, 피해자 면담 등을 거쳐 사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제안을 회사에 전했다.

성평등센터를 부서로 신설해 성평등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형태가 유력하다. 기존 성폭력 조사는 감사실에서 진행했는데, 전문성 없는 이들이 상담이나 조사를 진행하면서 2차 피해가 일어나는 등 신뢰를 잃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박은희 KBS 여성협회장은 “조사권의 경우 해석의 문제가 있어 여러 의견을 풀어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설명했다. KBS 홍보부는 “유관부서가 가안을 만들고 있다. 정확하게 어떤 형태가 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신중했다.

KBS의 신중한 반응은 성평등센터를 ‘사생활 보복’ 기구라 주장하는 일부세력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KBS 무보직 간부급 인사로 구성된 KBS 공영노조는 지난 15일 사내 게시판에 “성(性)문제 제기해 반대파를 매장시키려는 자들”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올렸다. 공영노조는 성평등센터를 두고 “이름조차 해괴하다”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경우 대부분 조사와 처벌을 받았다. 감사실이 그 기능을 해왔다. 그런데 다시 ‘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과거를 뒤진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공영노조는 심지어 “진실과 미래위원회가 과거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에 ‘업무적인 보복’이라면 ‘성평등센터’는 ‘사생활 보복’”이라며 “우리는 ‘성평등센터’를 단호히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공영노조는 KBS 간부 한 명이 모 협회 관계자에게 특정인 사생활을 문제 삼아 달라고 했고, 센터장 자리를 제안했다는 익명의 제보를 그 근거로 들었다. 이들은 성평등센터를 막기 위한 무효소송과 활동중지 가처분 신청 등 법률대응도 예고했다.

공영노조 성명 밑에는 “제 정신으로 쓴 글인가? 눈을 의심하게 된다”,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성폭력 문제를 보복이나 공작쯤으로 치부하다니 부끄럽다”는 등 KBS 구성원의 비판이 이어졌다. 한 구성원은 “직장 내 성희롱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규정돼 있는, 다시 말해 ‘사생활’ 문제가 아닌 ‘안전한 근로환경’에 관한 문제”라며 “이번 기회에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성희롱 매뉴얼 좀 읽어보길 권한다”고 지적했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고혜미 새노조 양성평등국장은 “공영노조 성명에는 할 말이 없다. 성폭력을 ‘사생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떤 설명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임을 증명한다”고 비판했다. KBS 새노조는 지난 19일 “(공영노조 성명은) 스스로 조사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 한 근거 없는 ‘딴죽 걸기’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KBS 감사실이 제 역할을 해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간 MBC, YTN 등 주요 방송사가 성폭력 사건을 신속하게 조사하고 가해자에게 해고 등 중징계를 내린 반면 KBS 감사실은 지난달 ‘성폭력 감사 중단’ 논란을 불렀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피해자에게 제기한 명예훼손이나 무고소송이 진행 중이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은희 여성협회장은 “사내 기구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으니 전담기구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며 “외부 전문가가 참여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향후 부서가 만들어지고 성폭력 관련 정의, 처벌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도 주요 과제”라고 말했다.

향후 기구가 만들어지면 사규나 지침 등 개정도 중요한 과제다. 2년으로 제한된 징계 시효, ‘비위사실이 중대한 경우’ 등 모호한 양형 기준 등 현재로서는 적절한 책임 규명이 이뤄지기 어렵다. 인사위원회가 남성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도 개선할 부분이다. 사문화된 성희롱·성폭력 예방지침 대신 성폭력 정의에서 징계 등 전 과정을 포괄하는 구속력 있는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박 회장은 “KBS 현실과 구성원 인식, 시스템 수준을 돌아보고 이를 개선해나갈 설계가 필요하다. 조직을 새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만큼 이견도 있지만, 출발선은 같다. 성평등센터가 실효성 있는 부서로서 지속가능하게 운영될 방안을 요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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