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 콘텐츠는 속칭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1일 20시간 넘는 촬영·제작, 2~3시간도 채 안 되는 수면 시간 등의 실태 논란은 스태프들에게 일상일 뿐이다. 방송계가 주당 근로시간 단축으로 골머리를 앓는 지금도 스태프들은 여느 때와 같이 초장시간 근로라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는 법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연구 결과 드라마 제작 인원의 91.7%는 비정규직이다. 시사교양은 67.6%, 예능은 74%에 달한다. 절대 다수인 스태프들이지만 제작 현장에서 절대 ‘을’이기에 갑이 원하는 만큼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잠을 자지 못하거나 안전 장비 없이 일하다 부상을 당해도, 그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게 돼도 손해는 본인의 몫이다.

노동 인권 사각지대에 갇혀 있는 방송 스태프들도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故) 이한빛 PD 정신을 기리고자 출범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노동·법률단체가 함께 만든 방송계갑질119 등이 불합리한 제작 관행을 폭로하고 있는 가운데 방송 스태프들 스스로 정당한 노동 환경을 요구하기 위한 한국방송스태프노조가 조만간 출범을 앞두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방송 스태프들을 위한 노조가 스태프들의 근로환경을 이끌고 있다. 미국의 경우 감독·작가길드, 스태프연합노조가 제작사협회 등과 스태프들의 근로조건과 복지 문제를 협상한다. 영국은 산별노조인 방송·예능·영화·극장노조(BECTU)가 제작사나 방송사별로 단체교섭을 갖는다. BECTU는 각 부문 프리랜서들의 임금, 근로조건 등 하한선을 설정하고 계약 관련 협약을 진행한다.

▲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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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스태프노조준비위원회(이하 스태프노조준비위)는 방송업계에서 방송사 정규직 직원을 제외한 모든 비정규직 스태프들을 위한 산별노조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출범했던 방송스태프노동조합이 유명무실화한 뒤 실제 스태프들을 대변하고 교섭에 나설 수 있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어졌다. 지난 3월 근로기준법 개정은 정식 노조를 준비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김두영 스태프노조준비위원장(한국드라마스텝연합회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지금은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법적 근로자 여부를 건건이 재판으로 확인 받아야 한다”며 “방송 제작 현장에는 불가피하게 사업자가 되는 이들이 있다. 현장에 종속된 근로자들이지만 계약서상 개인사업자라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 제작 현장에는 계약직, 프리랜서 외에도 조명, 음향(동시녹음), 발전차, 각종 장비나 소품을 나르는 차량 등을 다루는 개인사업자 형태의 노동자들이 있다. 조명팀의 경우 조명감독이 ‘턴키’(turn key·일괄수주계약) 방식으로 계약을 맺는데, 사건·사고 등 문제가 발생하면 계약상 하도급업체인 조명감독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스태프노조준비위는 올해 하반기 정식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스태프는 인간이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밥도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일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스태프들도 행복한 일터를 갖고 자랑할 만한 직장인이 됐으면 좋겠다. 그동안 쌓여 온 억울함을 어루만져줘야 한다”며 변화를 강조했다.

▲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TF가 지난 2월2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TF가 지난 2월2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언론·노동·법률단체들은 노동 당국에 드라마 스태프들의 법적 근로자성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다산인권센터·청년유니온·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으로 구성된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는 앞서 지난 2월 초장시간 노동 등 드라마 제작 현장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근로감독을 통해 프리랜서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이 인정되면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장시간 노동, 휴게시간 미지급,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제보 현장 근로감독을 실시한 고용노동부는 현재까지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 근로기준정책과 관계자는 “지난 3~4월 현장 종사자들에 대한 1차 조사를 마쳤다. 추가조사와 법리상 문제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발표 시기를)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TF는 고용노동부가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TF는 “방송사·제작사 촬영 스케줄, PD 지휘·지시에 따라 일하는 스태프들 실정을 제대로 봐야 한다”며 “방송사와 제작사들이 더 이상 제작현장을 치외법권으로 여기지 않도록 현명한 판단을 내려 고용노동부가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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