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1월12일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낯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폐막연설을 한 직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드리고 싶다”며 한국 기자들이 질문해주길 원했다. 한국이 훌륭한 개최국 역할을 해줬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손을 든 한국 기자들은 없었다. 중국 CCTV 루이청강 기자는 기회다 싶어 손을 들었고 질문권을 얻었다.

중국 기자는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중국기자”라며 “제가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을 던져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저는 한국 기자에게 질문을 요청했다”며 재차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 기자는 “한국 기자들에게 제가 대신 질문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어떻겠느냐”면서 끝내 질문했다.

▲ G20 정상회담 폐막식 장면 갈무리
▲ G20 정상회담 폐막식 장면 갈무리
당시 일은 EBS 다큐프라임 ‘왜 우리는 대학을 가는가’ 5편 ‘말문을 터라’ 편에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한국기자들은 왜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못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나왔고, 한국 기자들의 자질론으로까지 논란이 확산됐다.

지난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담 결과를 협상 당사자로부터 듣는 자리였기에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기자들 사이 신경전이 흐를 것이라고 예상한대로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두명의 한국 기자들이 질문했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한반도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한국 기자들이 적극 질문을 요청하지 않은 것 아니냐부터 질문 내용이 뻔하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기자회견 당시 질문권을 얻은 한국 기자는 KBS 특파원과 국내에서 파견된 아리랑 TV 소속 기자로 확인됐다. KBS 특파원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평양이냐, 워싱턴이냐”라고 질문했다. 아리랑 TV 기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할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논의를 할 것이냐”, “김정은 위원장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냐, 한국 그리고 중국도 서명국으로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느냐”고 질문했다.

기자회견은 한 시간 이상 진행됐지만 한국 기자들의 질문은 두 명에 그쳤고 질문 내용도 정상회담 핵심을 짚어내지 못했다는 비난이 나왔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많은 누리꾼들은 ‘월급 값을 못한다’, ‘싱가포르에 파견 나간 그 많은 기자들은 뭘 하고 있느냐’, ‘대통령과 통화하느냐는 단순한 질문에 그쳤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뉴스1은 <트럼프 기자회견서 한국 기자는 정말 질문을 안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불가피한 현장 상황을 강조했다.

뉴스1은 “당일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목이 있어야 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대부분의 질문을 ‘익숙한’ 자국 기자들에게 받았다”고 보도했다. 한국 기자들도 질문권을 얻기 위해 손을 들고 의사를 표시했지만 질문권은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미국 언론인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뉴스1 보도는 현장 상황을 설명하며 일방적으로 한국 기자를 비난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취지의 내용이었지만 여론은 오히려 악화됐다. 해당 기사에 대한 댓글을 보면 “질이 떨어지는 질문이다. 앞으로 한미관계와 안보 문제를 물었어야 했다”, “질문도 못하고 고개도 못드는 기레기들이 돌아와서는 책상에 앉아서 소설 쓰고 있다 등의 내용이 많은 추천을 받았다. 

남북정상회담 때도 외신이 오히려 객관적인 보도를 한다면서 국내 언론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도 한국 기자들은 질문도 하지 않고, 알맹이가 없는 질문을 한다며 불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자회견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을 취재한 결과 상황은 많이 달랐다. KBS 특파원은 취재후기에서 “미국 주요 언론들이 앞자리를 꿰찬데다가 질문이 끝날 때마다 50명, 백 명씩 손들고 자신을 봐달라고 소리치는 상황에서 질문 기회를 따내기는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특파원은 “워싱턴 한국 특파원단에서도 거의 모든 언론사가 싱가포르로 출장을 갔는데, 매번 질문 기회는 미국 아니면 유럽 기자 차지였고, 나머지는 중국 기자 한 명이 질문 기회를 잡았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석 전체 기자들 중 상대적으로 한국기자의 숫자가 적었기에 질문권을 얻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는 모두 100여명이고, 한국 기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KBS, JTBC, YTN, 아리랑TV 등 10여명이었다. 미국 특파원을 제외하고 현지에서 파견된 기자들은 취재 신청을 하고 비표를 받아야 기자회견장에 출입할 수 있었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관심이 컸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도 많은 한국 기자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자회견을 봤다면 한국 기자들이 적극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미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YTN 보도화면
▲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미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YTN 보도화면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한국 기자 어디에 있나요? 한국 기자 질문을 받아야겠다. 질문 하나는 한국 기자로부터 받겠다”고 말하면서 오해가 커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만 보면 한국 기자들이 적극 질문을 하지 않아서 배려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여한 일간지 한 기자는 “당시 상황은 아무리 한국기자들이 손을 들어도 질문권을 주지 않자 아리랑TV 기자가 ‘사우스 코리아’라고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 어디 있느냐라는 뉘앙스였지 한국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자 배려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현장 기자에 따르면 기자회견 참석 자리도 백악관 출입 기자단 소속 기자들에게 우선 배치됐다. 기자회견장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중간 양옆 자리는 백악관 출입 기자단에게 주어졌다.

일간지 기자는 “단상을 바라보고 가운데 자리는 이미 백악관 기자단이 차지하고 있어 한국기자들은 변방에 앉을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알고 있는 백악관 출입기자의 이름을 부르고 질문권을 주는 상황에서 아무리 손을 들어도 소용이 없었다”며 “KBS 기자가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 쪽으로 손을 가리키자 우격다짐으로 일어나서 마이크도 잡지 못하고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질문 내용이 아쉬웠다는 평가에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 계획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서명 당사국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우리 입장에서 충분히 보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기자들이 모여서 질문을 조율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