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유학생 시절 선거철이면 베를린 거리에 단출히 차려진 선거 부스들을 돌며 후보자가 주는 좋은 볼펜을 긁어모았다. 유학 초기 독일어가 짧아 몇자루 못 챙겼지만 15년 뒤 유학 말년엔 후보와 열띤 토론을 벌이고 함께 웃으며 볼펜을 다발로 챙겨가곤 했다. 덕분에 독일 볼펜은 돈 안들이고 원없이 썼다. 동료 유학생들에게 나눠주며 선심도 썼다.

독일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거운동은 우리처럼 요란하지 않다. 독일은 별다른 선거운동 규정이 없다. 정당과 후보자는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장소에 홍보시설물을 세운다. 정책을 담은 팜플렛과 연필, 볼펜부터 풍선, 사탕, 티셔츠까지 다양한 홍보물품을 유권자에게 나눠준다. 벽보나 시설물, 홍보물도 자유롭게 디자인하고 어디에나 붙인다. 도로법 규정을 받는 일반광고물과 같은 규제를 받는다. 정치광고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채워진다. 선거운동원과 후보가 직접 가정을 방문해 홍보하는 것도 가능하다. 규제 자체가 없다.

반면 우리는 ‘돈을 묶고 입은 연다’는 취지로 개정한 선거법에 따라 가정방문 선거운동을 금했다. 가정방문을 못하니 거리에서 확성기 볼륨만 높였다. 너도나도 유세차로 선거전을 달구니 거꾸로 돈 없으면 후보로 나서기도 어렵다. 우리 선거판은 금방이라도 선거혁명이 일어날 듯, 후보 이름을 외치고 거리가 떠나가라고 선거송을 틀어댄다.

독일 출마자는 대형마트 앞이나 시내 중심가에 파라솔 하나 세워놓고 지나는 시민에게 조용히 홍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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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헷쎈주 사민/녹색연정의 환경부장관으로 선서하는 요쉬카 피셔. 이때 신은 운동화은 오펜바흐(Offenbach) 가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출처:www.sueddeutsche.de)

물론 여기엔 연동형 비례대표라는 합리적 제도가 깔려있다. 독일 선거는 한 큐, 아니 한 표에 목숨 걸지 않는다. 한국에선 2위보다 단 한 표만 많으면 모든 걸 독식한다. 하지만 독일은 정당득표수가 전체 의석수를 결정짓는다. 한 후보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모두 출마해도 된다. 적녹 연정의 한 축이었던 독일 녹색당 요쉬카 피셔 당대표는 수차례 지역구에 출마해 번번이 떨어지고도 비례대표로 늘 당선됐다.

독일에 비하면 우리의 비례대표제는 엉터리다. 2004년 총선때 신생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득표율이 13.1%에 달했다. 그런데도 국회의원 299명 중 고작 10석(3.3%)에 그쳤다. 독일 같으면 13.1%에 해당하는 의원 39명을 배정받는다. 사표는 그만큼 줄어든다.

그 뿐만이 아니다. 평소에 잘 이루어지는 민주시민교육도 차분한 선거문화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참담한 나치 몰락을 경험한 독일은 민주시민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말 ‘교육’을 뜻하는 독일어 빌둥(Bildung)은 인격연마에 가깝다. 빌둥은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키운다. 종전 직후부터 이루어진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청소년 정치교육이요, 다른 하나는 평생정치교육이다. 먼저 학교에선 정치 과목 외에도 다양한 정치교육이 이뤄진다. 선거철이면 일선학교는 실제 선거와 똑같이 청소년 모의선거를 수업한다. 투표소와 투표참관인 등 정말 실전과 똑같다. 투표 용지가 실전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독일의 3,400여개 학교가 모의선거를 한다. 시민 대상의 평생교육은 연방과 주 정부의 정치교육원이 담당한다. 모든 자료가 거의 무료이고, 다양한 민주시민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TV 프로그램도 빠질 수 없다. 공영방송 ARD와 ZDF가 연합해 만든 어린이·청소년 전문채널 KIKA는 평소에도 정치프로그램을 고정 편성한다. 우리 케이블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이 거의 100% 만화인 것과 상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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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어린이방송 KIKA는 일찍 자는 독일 어린이를 위해 밤 9시엔 '내일까지 안녕...'이란 자막과 함께 정파한다.   (출처:블로그, 정화의 가르텐)
KIKA의 뉴스시간엔 10대가 직접 취재하고 앵커를 맡고 해설도 한다. 당연히 독일 어린이·청소년들은 정당별 환경정책의 차이점을 정확히 알고 이를 놓고 부모와 토론한다.

가난한 유학생 눈에 독일 지방선거는 볼펜 몇자루 얻어갈 뿐 재미없고 밋밋했다. 독일 정치인이 평소에도 지역의 작은 현안에도 시민과 토론하며 결론을 이끌어내고, 독일 시민이 평소에도 민주시민교육과 학교 모의선거, TV방송 프로그램으로 정치의식을 탄탄히 다진 걸 알기 전까진 말이다. 평소에 늘 사익과 공익의 일치점을 찾아가는 독일 정치판에서 요란한 선거운동은 애초에 필요없다.

미디어를 통해 수십 년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독일인은 평소에도 자신의 계급 이익을 정확히 알고 계급의식으로 무장해 있다. 이들에게 선거는 계급정치를 그저 확인하는 계기일 뿐이다.

이렇게 나는 15년 동안 수 백 자루의 볼펜을 챙기면서 독일 정치의 경험도 덤으로 챙겼다. 유세차 확성기 소리에 선잠을 깬 휴일 아침, 독일 정치의 든든한 기초를 닦은 미디어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우리도 그들처럼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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