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카톡방(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시작된 갑질 고발은 한 달만에 1천명짜리 노조를 만들었다. 채팅방은 몰려든 200명 목소리를 다 수용하지 못해 이들 만의 밴드방을 따로 만들었다. 날마다 새벽까지 온라인 대화가 쏟아졌고 추가 제보가 이어져 가입자는 400명을 넘었다. 순발력 있는 언론보도로 여론은 들끓었다. 노조 깃발을 든지 3일 만에 1천 명이 가입했다. 2017년 11월2일 ‘직장갑질119’ 카톡방에서 시작해 12월3일 노조를 설립한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노조(보건의료노조 한림대학교의료원지부)의 탄생 이야기다.

이 과정을 지켜본 ‘직장갑질119’의 박점규 활동가(현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는 원동력 중 하나로 ‘용기’를 짚었다. 성심병원 직원들은 ‘익명 카톡방→실명 밴드방→언론 인터뷰→노조 설립’ 흐름으로 한 단계씩 나아갔다. 직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행동한 게 해결의 단초였다.

박씨는 이에 빗대 “대한항공 직원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익명 카톡방이 ‘첫 번째 용기’고 가면 집회에 나선 것이 ‘두 번째 용기’라면, 세 번째, 네 번째 행동이 나와야 변화를 만들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 대한항공직원연대는 5월4일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갑질 조양호 일가 퇴진촉구 1차 촛불시위'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대한항공직원연대는 5월4일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갑질 조양호 일가 퇴진촉구 1차 촛불시위'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회사 카톡방 안 두려워해… 광장 나가는 용기 필요”

“카톡방에서 말만 하지 말고 광장엘 나와야 하고, 가면을 쓴 사람은 언젠간 가면을 벗어야 한다.” 박씨는 가면 착용을 이해하면서도 익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익명 대화방에서 아무리 많은 얘기가 오고가도 실제로 광장에서 뭉치는 경험이 없으면 소용없고 회사도 겁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항공 직원연대가 오너 일가 퇴진 운동을 하려면 ‘광장’이란 상승국면을 타야한다"고 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일환이었던 ‘희망버스’는 1차 800명이 모였지만 한 달 뒤 1만 명으로 불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는 3차까지 ‘5만(주최 측 추산)→30만→100만’으로 늘었다. 박씨는 이를 “두려움을 날리는 계기”라고 했다.

참여가 급증하는데 필수 조건은 ‘내부를 설득하는 사람’과 ‘집회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성심병원엔 직장갑질119 활동가의 고언이 있었다. ‘어떻게 언론에 나서냐’고 떨던 간호사에게 한 활동가는 “계속 숨어 살아서 지금까지 이렇게 일해온 게 아니냐. 지금 안 바꾸면 언제 바꿀 것이냐”고 직언했다. 노조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직원에겐 “노조 아니면 대안이 있느냐”고 쓴소리를 했다.

희망버스 기획단은 1차 버스가 출발하기 두 달 전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도 준비회의를 거쳐 시작됐다. 시민사회에서 모인 대표 24명이 24차 집회가 열린 6개월 간 매주 두세 차례 모여 8시간 이상씩 평가와 준비회의를 열었다. 밤샘회의를 불사하고 모두가 촛불집회에 '올인'했다. 이들의 헌신이 100만 촛불을 만들었다.

▲ ‘물벼락 갑질 논란’으로 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조현민(35) 전 대한항공 전무가 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경찰서에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서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물벼락 갑질 논란’으로 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조현민(35) 전 대한항공 전무가 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경찰서에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서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시민사회와 손 잡아야 ‘광장 민주주의’ 가능

“노조든 시민사회단체든 어디든 간에 조양호 회장 일가 퇴진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다 모아내야 한다.” 박씨는 대한항공 직원연대의 집회 참가인원이 300여 명에 머무는 이유로 ‘시민사회와 연대 부족’을 지적했다. 그는 “직원 보호를 위해 폐쇄적이어야 하지만 시민사회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로 촉발된 오너일가 퇴진 운동은 ‘을의 저항’으로서 넓은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는 직장 내 갑질문화를 바꾸는 ‘직장 민주화’이자 재벌 세습체제와 그에 따른 기업 사유화 구조를 개선하는 ‘경제민주화’ 운동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갑질 문화와 싸우는 모든 계층·시민과 손을 잡을 수 있다.

노동조합, 민주노총 등에 대한 거부감과 관련해 그는 “노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노동계, 민주노총, 회사 노조의 잘잘못은 다 따져가는게 맞다”면서도 “왜곡을 극복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 파괴’ 역사를 가진 대한항공엔 ‘민주노총은 기업 망하게 하는 곳’이란 왜곡이 레드 컴플렉스처럼 형성돼있다고 했다.

그는 노동계와의 연대 가능성 예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을 들었다. 광장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집회에 든 인력과 예산의 상당 부분은 민주노총 등 노동계에서 나왔다. 노동조합 관계자들은 ‘깃발을 내리라’는 요구가 거세 깃발을 들지 않았지만 전국에서 집결하는 등 집회 참여에 열성적이었다.

▲ 2017년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 승리 2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기념하며 폭죽을 터트리고 있다.ⓒ민중의소리
▲ 2017년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 승리 2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기념하며 폭죽을 터트리고 있다.ⓒ민중의소리

“‘조양호 OUT’은 ‘박근혜 OUT’과 같다”

박 활동가는 대한항공 직원연대의 싸움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성공할 시 재벌기업 직원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며 스스로 경영진을 교체해 낸 최초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는 7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준하는 축제같은 대규모 집회를 여는게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직원연대는 한 달 간 “불의한 경영진을 경영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은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내부를 설득하고 함께 하는 시민들은 신문광고도 내는 등 시민사회를 설득하면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박 활동가는 “적어도 몇 천 명이 모이는 광장의 민주주의를 경험하면 분명히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며 “그 중 절반은 대한항공 직원들이어야 한다. ‘용기의 집단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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