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재팬이 3년 만에 폐간할 때 나는 ‘국화와 칼’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라고 했다. 피부색 같은 이웃나라지만 일본인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시골동네 이발관에도, 도심의 목욕탕에도 정치 구단이 널렸다.

2000년 오마이뉴스 출범 전까지 뉴스 생산은 주류언론만 독점했다. “신문에 났어”하면 모든 논쟁이 끝났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근대언론 80년사에 파열구를 냈다. 오마이뉴스는 독자를 뉴스 생산의 주체로 세웠다. 쌍방향 뉴스엔 댓글도 달렸다. 점차 댓글은 동네 이발관처럼 거칠어졌다. 발행부수 많은 신문이 선거판을 쥐락펴락하던 30년 전처럼 더 많은 댓글이 이기는 구조가 됐다.

이런 여론 형성은 한국만의 특수성이다. 이웃나라 일본인은 댓글 공간을 열어줘도 대부분 침묵한다. 그렇다고 일본인이 정치에 무신경해서가 아니다.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 각자의 생각은 분명하다. 중앙정치가 그렇게 엉망인데도 지방자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건 이런 일본인의 체질 때문이다. ‘국화와 칼’은 지은이가 일본에 가 보지도 않고 썼다는 큰 한계에도 이런 일본인의 의식을 잘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국화와 칼’은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지은 일본에 관한 책이다. 오른쪽은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한국어 번역본.
▲ ‘국화와 칼’은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지은 일본에 관한 책이다. 오른쪽은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한국어 번역본.
온라인 뉴스 유통시장은 시골장터처럼 와글와글 시끄럽고 페이크 뉴스도 범람한다. 그래서 올드 매체는 아웃링크 강제법을 요구한다. 하지만 온라인은 올드 매체엔 없는 자정의 힘이 있다.

120년전 이 땅에 꽤 오래 머물다 간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도 1894년 2월 처음 도착한 한국 땅에서 만난 우리를 보고 “한국인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활기차다”고 했다. 60대 영국 여성이 11개월 동안 본 한국은 고스란히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담겼다. 비숍이 본 한국인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서양의 결혼 지참금 같은 나쁜 제도가 없다.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다. 치안이 최고라서 여자가 남자 도움 없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문자가 있어 문맹률이 낮다. 중국, 일본인보다 키가 크고 잘 생겼다. 미개발 자원은 많고 기후는 최상이다.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를 4번을 방문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 제물포에 도착해 나귀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가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단양 팔경을 보고, 금강산과 원산까지 다녀갔다. 두 번째 여행에선 서울에서 육로로 평양을 거쳐 두만강 너머 연해주의 조선인 촌락도 방문했다.

비숍은 거리 풍경만 본 단순 여행자가 아니었다. 1895년 고종 부부를 만났고, 민 황후 시해 뒤에도 고종을 두 차례나 더 만났다. 흥선대원군과 러시아 베베르 공사 등 조정의 거물과 외교관도 만났다.

청일전쟁의 전장터가 된 한반도 곳곳을 둘러본 비숍은 서구 열강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한국적인 것들을 하나씩 훼손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 중 최악은 건설중인 명동성당이라고 했다. 담합한 서구 열강들이 유서 깊은 왕국의 종말을 알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한다는 비숍의 시선은 정확했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책 일부분.
▲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책 일부분.
비숍의 장점은 다른 곳에 있다. “남편이 흰 옷만 고집하는 바람에 한국 여성은 빨래의 노예”라거나 “중국군은 뭐든 약탈하고 여자를 강간했다”며 젠더 시선으로 청일전쟁을 관찰했다. 동학군을 보고선 “반란군보다 ‘무장한 혁명군’에 가깝다”고 했다. 여주에서 만난 18살 양반 집주인은 14개의 방을 가진 저택에 프랑스 시계를 차고 독일 거울을 보고, 미국 담배를 피웠다고 했다.

물러나서 보면 훨씬 잘 보일 때도 있다. 우리 언론이 한반도를 보는 시선도 그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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