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칼럼으로 조선일보가 애국·보수 언론으로서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조선일보가 역사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달 31일 공개편지(‘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께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을 빌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에게 양상훈 주필 파면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앞서 양 주필은 이날 조간에서 북한 비핵화 선언에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북한 땅 전역에서 국제사회 CVID팀이 체계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자체로 커다란 억지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가 북핵 사찰을 철저히 해도 숨겨놓은 핵을 다 찾을 수 없겠지만, 북한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칼럼은 냉전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빠진 보수에 ‘출구 전략’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퇴로를 확보하는 건 좋은 판단”이라고 밝혔다.

이 칼럼에 발끈한 강 의원은 편지에서 “한겨레신문을 보고 있는지 깜짝 놀랐다”, “항복 문서 같은 칼럼이 나오면 김정은과 청와대만 웃게 된다”, “거짓보수는 당장 파면해야 조선일보 명예를 지킬 수 있다”면서 양 주필을 원색 공격했다.

▲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이치열 기자
▲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이치열 기자
두 사람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앞뒤로 지냈다. 서울 출신인 양 주필은 1984년 조선일보 공채 21기로 입사해 2011년 2월 편집국장이 됐다. 이 시기 강 의원은 TV조선 보도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2년 뒤 2013년 2월 양 주필 후임으로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경북 안동 출신인 강 의원은 1986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양 주필이 2년 먼저 입사한 선배다. 언론계에선 “후배가 선배 등에 칼을 꽂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쉬쉬하는 간부들, 펄쩍 뛰는 기자들

조선일보 간부들은 강 의원의 비난 논평을 애써 무시했다. 박두식 편집국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제 정치인 아닌가. 그분에게 물어보시라. 왜 이러시는지. 본인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강천석 논설고문도 “정치하는 사람 아닌가. 우리처럼 인쇄소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나”라고 했다. 취재에 응하지 않은 양 주필은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반면 일선 기자들은 적극 반발했다. 지난 1일 조선일보 기자들 익명 게시판(블라인드)에 “홍준표 대표께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 편지는 강 의원이 방 사장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그대로 차용해 강 의원을 비판했다.

작성자인 익명의 조선일보 기자는 “최근 모 대기업 모녀의 괴성 소리 녹음을 들으며 다시 강 의원의 국장 시절이 떠올라 몸서리쳤다. 발악하는 소리와 갑질 양상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라면서 강 의원의 국장 시절을 도마 위에 올렸다. 또 “강 의원의 기회주의적 행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성품은 공개편지에도 드러난다. 조선일보의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이 따위 편지에도 사장에게 아첨하며 이간질을 획책하고 있다”면서 강 의원 파면과 출당을 한국당 홍준표 대표에게 요구했다.

실제 조선일보 기자들은 고압적 분위기였던 강 의원의 국장 시절에 “술을 먹고 밤 10시쯤 들어와 1면 톱을 바꿀 때가 많아 힘들었다”, “1면에 왜 박근혜 사진이 없냐고 화를 낸 적이 있다고 들었다”, “편집국에서 욕하고 소리 지르는 걸 듣고 있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등 적지 않은 불만을 토로했다.

▲ 조선일보 기사와 칼럼에 대한 반응들. 그래픽=이우림 기자
▲ 조선일보 기사와 칼럼에 대한 반응들. 그래픽=이우림 기자
조선일보 기자협회는 성명을 내고 강 의원 편지를 ‘언론자유 침해’로 규정했다. 이들은 “칼럼 필자를 두고 ‘기회주의적 행각’, ‘이중인격자’ 운운한 인신공격은 책임 있는 정치인의 행동은 아니”라며 “더 이상 국회의사당을 더럽히지 말고 ‘파면’이라는 두 글자를 본인에게 적용하길 바란다”고 충고했다.

언론계에서도 비판이 잇따랐다. 한겨레 기자 출신 고광헌 서울신문 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일단 믿어 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조선일보 기자로는 큰 용기를 내어 칼럼을 쓴 양상훈 주필을 조선일보 출신인 강 의원이 파면하라고 주장했다”며 “(강 의원은) 어찌 저리 무모하고 어리석은지 대책이 없다”고 비판했다. 고 사장은 “강 의원은 박근혜 정부 초기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며 검찰 위상을 재정립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혼외자 문제로 옷 벗긴 당사자”라며 “그 뒤 박근혜 정권은 김기춘, 황교안, 우병우 등 공안검사 출신을 요직에 앉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다 초유의 대통령 탄핵 벼락을 맞고 자멸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가 박근혜 정권에 조력했고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강 의원이 이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통화에서 “한국당이 조선일보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강 의원 편지는 언론자유 침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도 명확히 강 의원 편지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국당과 조선일보는 같은 편’이라는 평가를 지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조선일보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자사 보도(지난 5월28일자 3면 “한미 정상회담 끝난 날, 국정원 팀이 평양으로 달려갔다”)를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수 같은 위험성을 품고 있는 기사”라고 비판하자 지난달 31일 기자 칼럼에서 “유독 조선일보만을 문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비판했다.

김진명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는 이 칼럼에서 “지금도 조선일보 기자들의 취재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 대변인이 문제 삼은 기사도 복수의 취재원들에게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것”이라며 “‘기자 김의겸’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이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한 한겨레신문의 과거 ‘오보’ 사례를 거론하며 김 대변인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강 의원 발언에는 ‘보도 침묵’ 중이다.

▲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의 지난 5월31일자 칼럼.
▲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의 지난 5월31일자 칼럼.
보수 위기 보여준 ‘공개편지’

편지는 언론인 출신 강 의원 입장에선 ‘나름의 전략’이었겠지만 달리 보면 보수 위기를 그대로 노출했다.

북·미 정상회담 지지 여론이 고조되면서 한국당 입지가 줄어들고 6·13 지방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조선일보 칼럼 하나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습은 ‘촌극’에 다름 아니다. 촌극을 빚어서라도 조선일보를 묶어두려는 셈법은 조선일보까지 발을 빼면 보수 자체가 무너진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아울러 조선일보와 한국당의 대립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보수에게 누구도 전략과 대안을 제시·주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조심스런 논조마저 검열을 요구받는 상황이다.

‘안티조선 운동사’ 저자인 자유기고가 한윤형씨는 “조선일보 출신 정치인이 한국당에 들어가서 조선일보 논조를 통제하려 했던 것”이라고 총평하며 “그동안 조선일보는 자사 ‘언론 탄압’ 문제를 세게 써왔던 언론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는 별다른 항의와 저항이 없어 사실상 ‘한국당과 한 식구’라는 인식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씨는 “강 의원 편지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당과 조선일보의 미래 대응 전략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며 “양 주필 칼럼은 남들이 이미 아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보수 진영도 생존은 해야 하니, 북·미 협상을 앞두고 (기존 논조에서) 물러섰다. 이 사건은 그 과정에서 나온 일종의 삐걱거림인데 한국당과 조선일보 모두 태극기 집회로 상징되는 반공 극우 세력을 계속 안고 갈지, 아니면 잘라낼지를 두고 고민이 깊을 것이다. 양쪽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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