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휘발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속보부터 사건 현장을 주목하는 스트레이트 기사까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새 뉴스에 밀려버리는 기사가 부지기수다. 기사에 긴 숨을 불어넣는 작업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속보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으려는 기자들은 오늘도 자리를 깔고 노트북을 편다. 

시사주간지 ‘시사IN’ 천관율 기자는 새로운 사실 관계를 발굴하고 이를 속보로 타전하는 능력이 “젬병”인 기자다. 그런 방식의 기사 작성을 피해 도망 다녔다. 인파이터로 생존할 자신이 없으니 아웃복서를 택했다. 

그에 따르면 글 쓰는 직업인 줄 알고 택한 기자는 알고 봤더니 사람 만나는 직업이었다. 낯가림이 심했던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사건과 현장을 주목했다. 그는 이를 ‘줌아웃’(촬영물에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영화 촬영 기법)이라고 혼자 부르곤 했다.

▲ 천관율 시사IN 기자가 지난 1일 서울 삼청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천관율 시사IN 기자가 지난 1일 서울 삼청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천 기자는 지난달 30일 자신이 썼던 기사들을 모아 책 하나를 펴냈다. 책 제목은 ‘천관율의 줌아웃’(zoom-out). 사안의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는 접근법, 드론으로 항공사진을 찍듯 뒤로 그리고 멀리서 보여주는 접근법을 더 좋아하는 그에게 어울리는 제목이다. 

그는 책 서문에서 “좋은 기자란 누구보다 ‘줌인’(zoom-in)을 잘하는 기자다. 피사체, 그러니까 취재 대상을 더 가까이 잡아당겨서 독자에게 더 상세히 보여줄수록 훌륭한 기자”라고 적은 뒤 “그래서 좋은 기자들은 디테일이 특히 강하다. 나는 그런 기자는 못 된다. 그래서 내가 택한 전략이 줌아웃”이라고 밝혔다.

지난 1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첨언했다. “현장에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친분을 드러내며 ‘아이고 형님’ 이렇게 못하는 성격이다. 새로운 사실을 제일 먼저 아는 능력은 무모할 정도로 없었다. 인파이터로서는 경쟁력이 없으니 도망치고 피하다가 아웃복서가 된 케이스 같다. 속보, 1보를 쓰며 인파이팅을 하는 게 여전히 기자의 본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더욱 평가받고 우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번에 펴낸 책을 두고 “독자들이 기사 모음집으로 간주하고 읽으면 기념 문집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려는 기우가 될 것 같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특히 2012~2017년 ‘5년’에 집중된 기사들이지만 2018년에 다시 읽어도 식상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이 책은 △촛불 체제가 탄생하는 결정적 순간 △촛불 체제 탄생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한국 보수의 몰락 △정권을 놓친 후 한국 진보파가 걸어온 지난한 과정 △여성·세월호 유족 혐오, 여자 아이스하키팀 단일화 불공정 논란, 일간베스트 등 온라인 담론 지형 분석까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천 기자는 “사건은 사라졌지만 구조는 남아있는 이슈들을 선별하고자 했다”면서 “구조와 맥락은 느리게 변한다. 느린 문제를 다루려면 ‘느린 저널리즘’이 필요하다. 운이 좋게도 시사IN이 느림에 관대하다”고 공을 돌렸다. 

‘느린 저널리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천 기자는 “기사 스타일상 가설을 들고 취재에 돌입한다”며 “메르스 사태 때 내세웠던 가설은 ‘공공병원이 없어서 빚어진 문제’였는데 실제 파악해보니 가설이 깨지더라.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니 통념이 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을 기사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천관율의 줌아웃/천관율 저/미지북스/2018년 5월30일.
▲ 천관율의 줌아웃/천관율 저/미지북스/2018년 5월30일.
독자들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슈는 2016년 ‘광장의 촛불’이다. 누군가는 ‘촛불 혁명’이라고도 부르는 광장의 민주주의는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천 기자는 이 책에서 “광장에 선 주권자들은 지독히 이기고 싶어 했고, 이길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탐색했으며 그 과정에서 ‘입법부’라는 주권자의 수단을 결정적으로 재발견했다”고 평했고 “2016년 겨울의 광장은 정치에 맞서서 승리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정치를 도구로 쓰는 데 성공하여 승리한 경험”이라고 분석했다. 

천 기자는 인터뷰에서도 “세계 역사를 찾아봐도 ‘체제 복원과 정상화’는 혁명보다 드물었던 일”이라며 “체제가 통치자(박근혜)를 버리고 주권자에 복무한 것인데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극소수 국가만 도달한 경지”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국정화와 자유주의를 조화시켜야 하는 불가능한 과제”라고 분석한 그는 “국가의 개입을 자유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는 자유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국정화를 정당화할 것인가”라며 보수 진영을 논파했다. 지난 2015년 기사이지만 한국 보수 퇴행을 곱씹어 보는 데 지금도 유효한 기사다.

천 기자는 “보통은 박근혜 정부 국정화 기획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느냐, 어떤 교수를 인터뷰할 것이냐를 놓고 아이템 발제가 이뤄지곤 하는데, 그걸 피해 도망 다니다가 나온 기사”라고 웃으며 말한 뒤 “진보나 보수나 상대 진영을 ‘바보’라고 무시한다. 보수가 왜 이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보수의 이론적 토대를 살펴보고 그걸 무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뤄보고자 했다. 그 진영의 사고방식을 이해 못할지언정 ‘멍청하다’고 섣부르게 결론짓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자칭 자유주의 진영은 ‘자유주의’를 배반하는 교과서 국정화 올인 전략으로 딜레마에 빠졌고 이는 보수의 몰락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또 천 기자는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정원 감축,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 중앙당 폐지 등을 정치 쇄신안으로 내놓은 정치인 안철수의 ‘정치 혐오’를 분석하며 “안 후보는 민주주의의 본령인 ‘갈등이 필연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갈등을 제도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기사에 대한 주석도 달렸다. “이 기사는 이른바 진보 언론 계열에서 안 후보를 가장 중요한 지면에서 전면 비판한, 내가 아는 한 최초의 기사다. 모두가 민감한 대선 국면이었고, 내 기자 생활에서 손꼽히게 어려운 판단이었다.” 이후에도 천 기자는 “안철수는 베버를 잘못 읽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안철수를 비판했다. 2018년 정치인 안철수는 이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린 저널리즘’을 통해 찬찬히 판단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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