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미디어 기업이 밀집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가 마련됐다. DMC산학협력연구센터 6층에 위치한 ‘휴(休)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는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등 미디어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과 휴식 공간으로 운영된다. 고(故) 이한빛 PD 유가족과 언론노조가 만든 ‘한빛 재단’과 서울시노동권익센터, 언론노조는 31일 개소식에서 업무 협약을 맺고 쉼터 의미를 알렸다.

오후 5시부터 1시간30분 가까이 진행된 이날 개소식에는 언론노조 방송사 지부와 언론 유관 기관 종사자,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는 비정규직·프리랜서 방송 노동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70평 남짓한 쉼터에 개소를 축하하기 위한 인파가 빼곡히 들어찼다.

▲ 5월 31일 오후 서울 상암동 DMC산학협력연구센터 6층에 위치한 ‘휴(休)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 개소식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5월 31일 오후 서울 상암동 DMC산학협력연구센터 6층에 위치한 ‘휴(休)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 개소식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사람들 앞에 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재단 이사장은 “감정처리를 잘 못할 것 같아 적어온 것을 읽겠다”며 반으로 접어 둔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이 이사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한빛이가 떠난 1년6개월을 오로지 오늘을 위해 달려왔다. 한빛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살아서 투쟁하지 왜 포기했느냐고 절규하느라 제 삶은 존재할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에야 한빛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다”며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죽음으로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오늘도 화려하고 거대한 DMC 빌딩숲 사이 광장에서 1인 시위 했다. 노동 현장을 꿈과 즐거움이 있는 행복한 일터로 바꾸는 것이 한빛 죽음에 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개소식을 하며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는 “열린 쉼터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연대와 소통의 공간으로, 함께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데 지원하는 권익센터로서 역할하기를 꿈 꾼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이 쉼터가 개소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을 호명한 뒤, 이한빛 PD 어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 김환균 언론노조위원장,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재단 이사장(가운데), 문종찬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이 업무협약을 맺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김환균 언론노조위원장,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재단 이사장(가운데), 문종찬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이 업무협약을 맺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개소식을 찾은 이들의 축하와 당부도 이어졌다. 이미지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은 “지난 2008년 한 방송작가가 23층 사옥에서 몸을 던졌다. 당시 ‘그런 일이 있었대’ 말하며 넘어갔다”며 “딱 8년 후 어떤 PD가 안타깝게 몸을 던졌다고 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탄압해야 하는 안타까움에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을 때 밀려왔던 감정은 지금도 잊기 힘들다”며 “쉼터가 부당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마중물이 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쉼터 옆 건물에 있는 tbs교통방송은 구성원 96%가 비정규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tbs 재단법인화와 단계적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강훈 언론노조 tbs지부장은 “다행히 많은 분들 지원 속에 이르면 6월 말 프리랜서와 파견 노동자들의 직접 고용이 이뤄질 것 같다. 출범 5개월 째인 ‘햇병아리’ tbs지부도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날 개소식에선 주요 방송사와 일간지 등 대형 언론사 인사와 여전히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 데 모였다. 오랜 시간 스크립터로 일하다 최근 감독으로 입봉했다는 한 노동자는 마이크를 잡고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제대로 된 갑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얼마 전 한 방송사 PD에게 늦게까지 촬영하다 큰일 날 수 있다고 하니 ‘괜찮아, 방송국 뒤에 숨으면 돼’라고 하더라. 그게 본사 PD들 인식이라는 게 놀라웠다”며 “방송사가 제작사에 노동시간을 제대로 지키고, 현장 감독에게는 똑바로 하라고 ‘갑질’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미디어 노동자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상시 법률상담과 노동자가 알아야 할 제도 등을 교육한다. 프리랜서처럼 사무실 없는 이들이 언제나 업무장소로 활용할 책상과 회의실도 있다. 쉼터 한켠에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휴식·수면 공간도 있다. 정해진 시간 외에 쉼터 이용을 원하면 미리 연락하면 사용할 수 있다. 쉼터 관계자는 직원 세 명이 쉼터를 관리하다보니 시간에 제약이 있다며 향후 가능한 만큼 운영 시간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제보하고 실태 조사 등을 원하는 미디어 노동자는 △미디어 신문고 △카카오 플러스 상담서비스 등을 통해 한빛센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한빛센터는 tvN ‘나의 아저씨’, SBS ‘시크릿 마더’, MBN ‘리치맨’ 제작 현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본사와 직접 접촉하는 등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실제 해당 방송사들이 미약하게나마 스태프 휴식시간 보장 등 개선안을 이행했다. 

한빛센터는 다음주부터 드라마 등 제작발표회에 수시로 찾아가 제작환경 개선을 요구한다. 탁종렬 한빛센터 소장은 “싸우자는 게 아니라 감독과 주연 배우들에게 스태프들의 노동 인권을 보호해달라는 호소하려 한다”고 말했다. 탁 소장은 방문할 제작발표회는 무작위로 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탁종렬 한빛센터 소장이 경과보고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탁종렬 한빛센터 소장이 경과보고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전규찬 언론정보학회장이 업무협약을 맺기 전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전규찬 언론정보학회장이 업무협약을 맺기 전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방송 제작현장 실태분석과 대안 마련에는 언론정보학회도 동참한다. 이날 한빛재단과 업무협약을 맺은 전규찬 언론정보학회장은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스태프, 프리랜서 등 어쩌면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외치게 될지 모를 학생들을 가르친다. 연구자들이 더 이상 강단에 머물지 않고 무명(無名)의 노동자들과 함께 개선방안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한편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표해 참석한 고삼석 방통위 상임위원은 “5개 정부부처가 머리를 맞댄 결과 지난해 12월 외주제작시장 불공정 관행 개선을 위한 종합대책이 나왔다. 올해부터 매 분기 점검하고 있다. 딱 1년만 정부를 지켜봐달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씀드린 적 있다. 새로운 것들을 만들고 구체적인 제도를 안정시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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