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국가정보원이 MBC 방송·제작에 불법으로 관여한 혐의(국정원법 위반 등)를 받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구속)과 김재철 전 MBC 사장의 형사재판이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기일에는 2009~2011년 당시 MBC 출입 국정원 IO(Intelligence Officer·국내 정보 담당관) 권아무개씨가 증인으로 나왔다.

원 전 원장 지시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은 김재철 전 사장 취임날이기도 한 2010년 3월2일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 문건을 작성했다. 이 문건은 ‘좌편향 인물과 문제 프로그램 퇴출→노조 무력화→민영화’로 이어지는 3단계 MBC 장악 시나리오를 담았다.

문건대로 ‘좌파 성향’ 방송인과 PD수첩 등 MBC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대거 교체됐고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조합원들은 탄압 받았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영화 시도가 이뤄졌다가 무산됐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재철 전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재철 전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권씨는 이 시기 MBC를 출입한 IO다. 그는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 문건을 직접 본적은 없다고 말했다. MBC를 상대로 한 자신의 첩보 수집이 문건에 반영될 순 있어도 거기에 살을 붙이고 방대한 문건을 만드는 작업은 소관 업무가 아니었다는 것.

권씨는 지난 2009년 7월부터 2011년 7월까지 MBC 정보 수집관으로 근무했고 이보다 앞서 2009년 3월부터 7월까지는 외신 쪽을 담당했다. 이 기간 중 3주 동안 YTN을 담당해 정보를 수집했다. 2009년 YTN도 MB 정부 ‘방송장악’으로 노사가 격하게 대립했다. 권씨는 “YTN 담당일 때는 (상부로부터) 연예인 퇴출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권씨는 공판에서 자신이 전영배 전 MBC 기획조정실장 등 MBC 전직 경영진에게 방송인 김미화·김여진 하차와 PD수첩 제작진 교체를 요구한 적 있고 실제 MBC에서 출연진 교체 등이 이뤄져 상부에 실적보고를 올렸다고 밝혔다. 다만 원 전 원장으로부터 직접 지시 받은 적은 없고 주로 자신의 직속상관 지시를 따랐다고 밝혔다.

그는 김 전 사장의 전임 사장이었던 엄기영 전 MBC 사장(재직 기간 2008년 2월~2010년 2월)에게는 상부에서 불편해하는 김제동·김미화 등 방송인의 출연을 자제시켜줄 것을 우회적으로 요청했고 MBC 경영진 가운데 주로 전영배 전 실장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권씨의 잦은 요청에 전 전 실장은 “PD 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사장으로 와서 한번 해봐라”고 반발했다.

권씨는 2010년 국정원 요청에 따라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재직기간 2009년 8월∼2010년 3월) 이사장에게 MBC 경영 관련 국정원 문건을 전달한 적이 있다고도 밝혔다. 김 전 이사장은 미디어오늘에 “(국정원으로부터) 문건을 받은 일도, 본 일도, (김재철 등에게) 전달한 일도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는 “IO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요구했던 것들(방송인 하차와 PD수첩 인사 교체 등)을 이미 MBC 경영진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원 상부와 MBC 경영진이) ‘마스터 플랜’을 공유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작진 교체 등) 편성·제작권은 MBC에 있다. 나는 협조를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IO와 MBC 경영진이 상하 관계가 아니었기에 자신은 요청만 했을 뿐 전적으로 자신 때문에 MBC 출연진이 하차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다. 그는 “MBC 경영진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내가 그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식으로 압박·협박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 주진우 시사IN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 주진우 시사IN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이번 증인신문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이 2009년 MBC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한 주진우 시사IN 기자에 분노해 “당장 조치를 취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는 증언도 나왔다. 권씨는 검찰 조사에서 이와 같은 원 전 원장의 불호령 직후 주 기자를 교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밝혔다. 권씨는 “(원장의 불호령이 있다는 것을) 2009년 IO 재직 중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주 기자도 지난해 9월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파업 집회에서 “저도 MBC 프로그램에서 박원순 시장을 인터뷰를 하던 중 원세훈 얘기를 한 번 했는데 그날 잘렸다”고 말한 바 있다.

검사는 “김미화 퇴출에 일부 MBC 경영진이 공감했다고 하더라도 2009~2010년 퇴출이 안 되니까 국정원 상부에서 계속적으로 (국정원 IO에게) 지시했던 것이고 (권씨가) 김미화를 해임해달라고 한 것 아닌가”라며 국정원의 MBC 제작·인사 관여 혐의를 추궁했다.

반면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은 MBC 경영진이 권씨 요구 이전부터 방송인과 제작진 교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문건’에 대해서도 “MBC 간부 말을 듣고 정리한 것이다. ‘국정원의 MBC 마스터 플랜’이 아니라 ‘MBC 경영진의 마스터 플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판에는 두 피고인(원세훈·김재철)도 출석했다. 신문은 이뤄지지 않아 피고인들은 2시간여 동안 자리를 지킨 뒤 재판정을 떠났다. 김 전 사장은 재판정을 나오며 미디어오늘 취재진에 “재판과 관련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도 “오늘도 확인했겠지만 MBC는 장악할 수도, 장악될 수도 없는 회사”라고 말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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