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의 미친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이희정 한국일보 미디어전략실장이 쓴 4월20일자 칼럼 ‘“기자라서 좋았고 기자여서 슬펐다”’는 언론계의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디어환경의 엄청난 변화 속에 이희정 실장의 후배 기자도 사표를 내고 떠났다. 이 바닥의 ‘미친 속도’는 비단 기자들만 겪는 일상은 아니었다.

“제가 원래는 굉장히 동안이고, 머리숱도 많았는데….”

▲ MBC '무한도전' 북극곰의 눈물' 편에 출연했던 조준묵 PD.
▲ MBC '무한도전' 북극곰의 눈물' 편에 출연했던 조준묵 PD.
2016년 MBC 무한도전 ‘북극곰의 눈물’편에서 박명수와 동갑으로 화제를 모았던 조준묵 PD.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23년차 MBC 시사교양PD다. ‘북극의 눈물’을 촬영하면서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떨리던 순간을 경험하는가 하면, 애인이자 동지였던 김보슬PD와의 결혼을 나흘 앞두고 신부가 검찰에 체포되는 일을 겪으며 또 한 번 온몸이 떨리던 순간을 경험했다. 그가 마주했던 지난 23년은 MBC의 ‘흥망성쇠’이기도 했다. 그는 MBC가 ‘잃어버린 10년’의 여파로 ‘미친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노라 말한다.

1990년대 생 젊은이들에게 1990년대 MBC는 신화속 존재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교양프로그램 시청률도 40~50%대를 찍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MBC는 시청률이 너무 높게 나와 고민인 적도 있었다. “‘경찰청사람들’의 경우 위에서 시청률을 좀 낮추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시청률이 좀 빠지면 30%대였고, 드라마는 60~70%가 나올 때도 있었다.” 그가 입사한 1995년은 한국에서 케이블채널이 등장한 첫 해였지만, MBC에겐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MBC의 경쟁상대는 MBC 자신이었다.

▲ 1990년대 유명 프로그램 '경찰청사람들'.
▲ 1990년대 유명 프로그램 '경찰청사람들'.
2003년, MBC의 상징과 같은 ‘PD수첩’ 연출을 처음 맡았다. 당시 연출했던 ‘16년간의 의혹, KAL폭파범 김현희의 진실’편이 18%가 나왔다. 당시만 해도 일상적인 시청률이었다. “한 자릿수 시청률이 나오면 ‘야 9가 뭐냐’ 이러면서 혼났다.” 2008년 ‘북극의 눈물’ 연출 당시에도 13~14%는 나왔다. 2009년 김제동씨와 함께 했던 ‘오마이텐트’ 역시 13% 정도는 나왔다. “PD는 세월 가는 줄 모른다. 8주차로 6번 방송하면 1년이 간다. 지루할 틈이 없다. 세월보내기 좋은 직업이다. 보람도 느꼈다”고 말한 그는 “김재철 이전까지는 참 재밌는 직업이었다”고 회상했다.

2010년부터 MBC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은 ‘미친 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명박정부는 MBC를 장악하기 위해 김재철 사장을 내려 보냈고, 스마트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언론계는 미디어법 이후 신문사들이 방송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사실 지상파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지상파가 이 꼴이 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외적 환경의 변화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순간에 아무것도 못했다. 그래서 더 급격하게 무너졌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HD로 바뀌는 식의 방송 기술 변화는 PD들에게 주요 변수는 아니었다. 6mm 카메라가 등장하고 근접촬영이 가능해지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식으로 프로그램의 작법 또한 환경에 맞춰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방송기술의 변화도 스마트폰의 충격과 비교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게 조PD의 설명이다. “MBC와 KBS 구성원들의 불행이 뭐냐면, 스마트폰이 나온 시점에서 콘텐츠를 어떻게 제작해야 하나, 스마트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논의하고 대처할 시간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야 했다는 거다.”

2012년은 한국사회 미디어지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준 해다. 두 공영방송의 영향력이 추락하고, 종편과 케이블의 영향력이 증가하며 모바일중심의 시청습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MBC는 무려 170일 간 ‘무한도전’을 멈추며 싸웠지만 파업은 실패했다. 종합편성채널은 시사보도 중심 편성으로 단기간에 시청률을 끌어올렸고, KBS 간판이었던 나영석PD는 그해 12월 사직서를 내고 CJE&M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한국은 그 해 스마트폰 보급률 1위 국가가 됐다.

▲ 유튜브 로고.
▲ 유튜브 로고.
“유튜브 같은 건 상상도 못해봤다”

조PD는 23년간의 PD생활 중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변화로 유튜브의 등장을 꼽았다. “유튜브 같은 건 상상도 못해봤다. 스마트폰은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왔던 것 같다. 인터넷 친구 찾기를 하면서 페이스북까지는 생각할 수 있었는데 유튜브 같은 콘텐츠 플랫폼은 생각도 못했다. 누가 운영하는 건지, 저건 어떻게 제작을 해야 되는 건지, 우리는 편성표에 맞춰야 하는데 저건 어떻게 편성을 해야 하는 건지…. 우리는 배워야 하는 입장이 됐다.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유튜브 광고시장이 놀라운 속도로 커졌지만 대처는 부족했다. 싸우는데 온 힘을 썼다. 회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됐다. 시청률은 뚝뚝 떨어졌다. MBC 정상화를 위해 새 사장이 왔지만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올해 MBC의 한 평일드라마는 시청률 1% 대를 기록했다. “기술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콘텐츠를 어떤 식으로 생산할 것이냐. 그걸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새로운 플랫폼에 적응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만든다.”

종합편성채널의 등장과 CJE&M의 성장도 레거시미디어 MBC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JTBC를 보나 MBC를 보나 똑같다. 이젠 어떤 채널을 보나 정보의 양이 비슷하다고 느낀다. 과거 국가의 중요한 이벤트가 생기면 KBS 아님 MBC였지만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당시 많은 사람들이 JTBC를 봤다. … (지상파PD들을 케이블에) 뺏긴 지상파가 바보다. 사람 관리를 못한 것이다. 대우를 잘 해줬다면 달랐을 것이다. 임정아PD도 MBC가 정상적이었다면 절대 (JTBC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신입사원 채용이 멈췄던 것도 ‘잃어버린 10년’의 뼈아픈 기억이다. “노래방 가면 옛날 노래만 부르게 되는 거다. 요즘 노래는 모르게 된다. 조직을 바보로 만들었다. 혼란한 시기에 중간층이 (비제작부서 발령 및 퇴사로) 날아갔다. 역량이 전수되지 않았다. 선배와 후배와 갭이 커지면 노하우 자체가 올드할 수밖에 없다. 선배들은 어느 순간 내가 꼰대가 되어있다는 걸 모르게 되는 거다.”

▲ 조준묵PD. ⓒMBC
▲ 조준묵PD. ⓒMBC
“지금껏 지상파는 곳간에 있던 걸 빼먹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진단한 그는 지금이 MBC의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튜브를 두고 “하나의 매체로 생각해야 하는데 예고편을 내보내는 공간 정도로 여전히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있다”며 “동등한 매체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상파 프로그램 노출→인터넷 확산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로로 수익모델을 만들어 지상파 안에서도 교양물이 자리를 잡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한국의 지상파가 교양이란 장르의 수지타산이란 이유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시대에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ENG카메라가 시작되면서 지상파 다큐가 시작됐는데 그때와 지금의 방식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조준묵PD는 지금 ‘PD수첩’ 연출을 맡고 있다. “MBC 시사프로그램은 팩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박는다. 요즘 시청자들 반응은 어렵다거나 보기 힘들다는 식이다. 아마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한 부분일 것이다.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어떻게 하면 시사프로의 시청자를 묶어둘 수 있을까 고민이다.”

23년 전, ‘언론사입사지망생’ 조준묵에게 선망의 대상은 ‘시사저널’이었다. 원서를 냈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으로 시험을 치지 못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잡지사 기자가 됐다면, 물론 붙지도 못했겠지만, 내 소원대로 붙었다면, 그럼 지금보다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잡지는 지상파보다 더 외면 받으니까.” 이 바닥의 ‘미친 속도’ 앞에서, 23년차 PD는 오늘도 영광의 순간을 되찾기 위해 거리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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