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굴뚝에 올라간 차광호는 408일 동안 공중에 떠서 무엇을 기다렸을까? 눈보라가 몰아치고 비닐천막 안 모든 것이 얼어붙어도, 한여름 뙤약볕 열기 속에서 눈알이 빠질 것 같아도, 쏟아지는 장대비에 한기가 들어 사시나무 떨리듯 온 몸이 떨려도, 가족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도, 함께 투쟁하던 노동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반듯이 누울 수도 없는 굴뚝 위에서 408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고용 승계, 노동조합 승계 및 단체협약을 보장하겠다는 양치기 소년의 약속을 믿고 2015년 7월 땅으로 내려왔다.

2017년 11월 굴뚝에 올라간 홍기탁과 박준호는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200일 동안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들은 3승계와 함께 노동악법 철폐, 헬조선 악의 축 해체(독점재벌 국정원 자유한국당)를 덧붙여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내려오지 않겠다는 얘긴가?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당연한 요구인데도, 그들의 요구가 부조리해 보인다.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요구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느 새 사고가 부조리한 현실에 젖어있는 걸 깨닫는다.

▲ 희망지킴이 2000인 선언 6·2 울뚝불뚝 희망문화제
▲ 희망지킴이 2000인 선언 6·2 울뚝불뚝 희망문화제
2018년 5월 그들의 고통을 가만히 바라본다.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이 굴뚝에 오른 지 408일 만에 지상으로 내려와서 2년 4개월 뒤에 다시 굴뚝에 오르고 200일이 지났다. 한국합섬이 파산한 2007년부터 셈하자면 10년이 넘었다. 상황은 변한 게 없다. 시간이 쌓이지 않는다. 그 전에 쌍용차의 이창근 김정욱이 올라갔고, 유성기업의 홍종인이 올라갔고, 콜트콜텍의 이인근이 올라갔고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올라갔고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이 공중으로 올라갔지만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누군가 또 고도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 곤두박질 쳤던 노동인권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촛불정권이 뭐하는 거냐고. 정권만의 문제일까. 그들의 투쟁이기 때문이 않을까. 노동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들이 투쟁으로 일궈낸 벽돌로 집을 짓고 그 속에 편안히 앉아서, 화면 너머로 바라보며 그들의 투쟁을 타자화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투쟁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이다. 그들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결코 굴뚝 위에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이 개인의 한계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리도 펴지 못하는 75미터 고공에서 난방 없는 겨울을 보내고 씻지 못하는 여름을 보낸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저려온다. 광화문 캠핑촌에서 노숙을 하며 겨울을 날 때, 너무 추워 새벽에 온기를 찾아 할리스로 가 몸을 녹이고, 며칠을 씻지 못하다 간신히 사우나에 가서 머리를 감으며 견뎌냈던 기억이 몸에 남아있다. 아직도 추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을 느낀다. 그런데 그마저도 못하고 흔들리는 75미터 고공에 갇혀있다고? 도망갈 곳도 기댈 온기도 없는 그 감옥보다 못한 공간에서 200일을?

부당해고의 고통도 가늠하기 힘들다. 가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해체되는 고통. 다시는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면, 단식을 하고 굴뚝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더 극단적은 고통을 선택해야 그나마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일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 등대처럼 빛을 내고 있는 그들의 투쟁이, 우리의 투쟁이 될 때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튼튼할 것이고, 내 자식이 쉴 집이 생기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우선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쌓이지 않는 세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는 것. 그 기다림이 부조리하던 내 마음을 만져준다. 이제 난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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