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마침내 풀려났다. 본란에서 네 차례나 석방을 촉구한 필자로선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다만 짚고 싶다. 한상균을 살천스레 비난해온 조선일보는 논외로 하자. 절대 다수의 언론이 촛불 정부 아래서도 그가 철창에 갇힌 모순을 보도하지 않았다. 일부 ‘깨시민’은 한상균을 왜 석방하느냐고 힐난하는 댓글을 달았다.

굳이 그 사실을 적는 까닭은 한상균의 석방과 별개로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이 민망할 만큼 낮아서다. 대한민국 국민은 학교에서 노동의 의미를 배우지 못한다. 언론도 오랜 세월에 걸쳐 노동을 적대해왔다. 그 결과다.

“노동자는 ( )다.”

괄호 안에 대한민국 국민은 무엇을 쓸까. 당장 독자 자신은 어떻게 채울 것인가. 수도권의 한 비정규노동센터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물은 결과는 놀랍다. “거지”, “돈 버는 기계”, “못 배운 자들” 따위로 답했다. ‘노동자’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기성세대에게도 어금버금하다.

▲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사진=이치열 기자
▲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사진=이치열 기자
그래서다. ‘근로자를 노동자로 부르자’는 제안에 공감하면서도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의문이 든다. 물론, 근로자의 날은 노동절로 불러야 마땅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할 때도 5월1일을 노동절로 불러왔지만 독재자 이승만이 공산주의 운운하며 대한노총(현 한국노총)을 창립한 3월10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1990년대 들어서서야 다시 5월1일을 기념하고 있으나 명칭은 지금도 근로자의 날이다.

새삼 짚자면 근로자는 ‘근면성실하게―주어진 질서에 순종하며―일하는 사람’이다. 독재정권이 그 말을 애용한 이유다. ‘근로’라는 말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 민중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근로정신대’에서 비롯했다. 오늘날 일본조차 ‘근로자’를 쓰지 않는다.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대만도 물론이다. 애오라지 대한민국만 즐겨 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회는 ‘근로기준법’이 상징하듯 모든 법령에서 근로자를 공식 법률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입법부인 국회가 여태 ‘근로자’를 고수하는 까닭이 반드시 새누리당 때문 만일까.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려는 움직임은 환영할 일이다. 다만 진지하게 묻고 싶다. ‘노동자’라는 말에 부정적 어감이 퍼질대 퍼진 상황에서 그것으로 충분할까.

무릇 사람은 자유롭고 의식적인 존재다. 동물과 다른 결정적 이유다. 그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이 바로 ‘노동’이다. 노동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사회적 존재가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주변을 돌아보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의 기반이 되는 모든 것은 사람들이 노동하는 수고로 생산했다.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먹고 입고 머무는 기초 생활과 일상의 생필품에서부터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간의 내면에 떠오른 구상을 현실화한 노동의 결과물이자 창조물이다. 아무리 창조적인 생각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노동이 없다면 현실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가는 고갱이인 노동을 온전히 평가하지 않는 사회는 바꿔나가야 옳다.

자본주의가 발생한 영어 문화권에서 쓰는 ‘worker’의 적실한 번역어는 ‘노동자’보다 노동하는 사람, 곧 ‘노동인’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쓰는 말들을 떠올려보자. 상공인, 기업인, 경제인이다. 그들 스스로도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자본가’도 ‘가’로 끝난다. 대한민국 법률에 ‘사용자’라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그 말에 부정적 어감은 없다.

영어권에서 ‘worker’에 ‘거지’를 떠올리는 청소년이 있을까. 국회와 정부에 맡겨두고 기다리기엔 백년하청일 수 있다. 그들이 적극 나서기위해서도 언론이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에 정중히 제언한다, ‘근로자’나 ‘노동자’를 ‘노동인’으로 표기할 것을. 21세기 민중인 네티즌에게 옷깃 여미며 제안한다, 노동인을 ‘노동인’으로 쓰자고, 세상을 바꿔가는 작은 운동을 펼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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