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던 여학생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 의해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됐다. 고문에 시달리던 그는 오랜만에 햇살을 봤던 9월4일, 비빔밥 한 그릇을 사줬던 수사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9월5일 기소유예로 풀려난 후 그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38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5·18로 멈춰져”버렸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8주년 메시지를 통해 정부 공동조사단을 꾸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비인도적 범죄행위와 인권유린 책임을 가려내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짓밟힌 여성들의 삶을 보듬는 것에서 진실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겠다”며 “역사와 진실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 우리 결의가 더욱 절실하다”고 전했다.

공동조사단에는 국방부 외에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가 포함된다. 피해자 보상과 더불어 명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가해자일 수 있는 국방부로 조사 주체를 한정하지 않은 것이다. 여성부는 “국방부, 인권위 등과 협의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 관점에서 지원 및 치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5·18기념식에는 행방불명자 가족들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5·18 때 행방불명된 아들 이창현군을 찾아 헤맨 아버지의 38년 사연을 담은 ‘영원한 소년’이 공연됐다. 공연에는 아버지 이귀복씨가 직접 참여했다.

▲ 5월19일자 한겨레.
▲ 5월19일자 한겨레 5면.
▲ 5월19일자 경향신문 7면.
▲ 5월19일자 경향신문 7면.

1968년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21일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부상 당했던 두 명의 베트남 여성을 위한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이들이 한국 정부에 국가배상 소송을 내는 형식의 모의법정에서 목격자의 증언과 학살에 관한 기록이 낱낱이 공개됐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이 재판을 위해 8년 만에 법복을 꺼내 입었다.

대입개편공론화위원장으로서 한겨레와 인터뷰한 김 전 대법관은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흐름 속에 있어야 하지만, 구체적 방법은 계속 논의를 해야 한다”며 “베트남 학살 문제는 인류의 근본 가치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전 대법관은 인터뷰를 통해 입시 문제 공론화를 이끌게 된 이유, 법조계 미투가 드물 수 밖에 없는 이유 등을 밝혔다.

▲ 5월19일자 한겨레 4~5면.
▲ 5월19일자 한겨레 4면.
▲ 5월19일자 한겨레 4~5면.
▲ 5월19일자 한겨레 5면.

북한, 풍계리 취재단 명단 접수 안해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가 23~25일 예정된 가운데 북측이 이를 취재할 남한 측 기자단 명단을 받지 않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18일 “북측이 통지문을 받지 않았다”며 “북한이 사유를 알려준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취재 사실상 거부”로 규정하며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북한이 한·미 연합 공군훈련인 ‘맥스선더’를 이유로 남북 고위급 회담을 돌연 취소한 데 이어 우리 측 취재진마저 거부하면서, 핵실험장 폐기 일정 자체가 나오고 있다”고도 했다.

제목과 달리 기사 본문에서는 북측의 ‘취재 거부’를 확정적으로 다루진 않았다. 조선일보는 정부 소식통 입을 빌려 “아직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완전히 취소할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며 “한국을 제외한 외신 기자들도 북한 측으로부터 정확한 지침을 받지 못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주말을 지나면서 북한이 통지문을 접수해 예정대로 일정을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측은 앞서 한·미·영·중·러 5개국 기자단을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초청한다고 밝힌 바 있다. 12일 북한 외무성 공보는 해당 국가 기자들에게 현지 취재를 허용한다며 취재진에 베이징부터 원산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도록 전용기를 제공하고 풍계리 핵실험장까지 특별전용열차를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남한 취재단에는 언론사 추첨을 통해 MBC와 뉴스1이 선정됐다.

정치인 단식, 왜 조롱거리 됐을까

“그때에는 도시가 온통 단식 광대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루하루 단식이 계속됨에 따라 관심이 더욱 커져 갔다. 다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단식 광대를 보려고 했다. 나중에 가서는 종일 조그만 격자 창살 우리 앞에 죽치고 앉은 예약 신청자들도 있었다. 밤에도 효과를 높이기 위해 횃불을 켜고 공연이 행해졌다.” (프란츠 카프카 ‘단식 광대’ 중)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단식은 왜 조롱을 받았을까. 정치인의 단식은 언제부터 약자의 최후 투쟁 수단을 희화화하는 행위로 비난 받게 됐을까. 경향신문 토요판이 ‘단식투쟁의 정치학’을 다뤘다.

▲ 5월19일자 경향신문 10면.
▲ 5월19일자 경향신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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