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6시에 모여서 촬영하는데 아직도 안 끝났다네요. 바로 디졸브로 다른 일 가는 프리 스태프.” “오늘도 디졸브ㅠㅠ 힘내세요.” (방송계 갑질 119 및 방송스태프 익명 채팅방 내용 발췌)

편집할 때 앞뒤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는 편집 기법 ‘디졸브’. 방송계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느라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이 와 버리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빗대어 사용한다. 업무를 마친 뒤 휴식 없이 바로 다른 업무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최근 SBS 드라마 ‘시크릿 마더’의 20시간 넘는 초장시간 촬영이 지적된 가운데, MBN 드라마 ‘리치맨’ 역시 장시간 노동에 방치된 방송 스태프들이 안전 장비 없이 위험한 촬영에 임해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는 최근 ‘리치맨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2월19일 이후 4시간 미만 수면을 하고 있으며 제보 바로 전 이틀 동안 단 1시간도 자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한빛센터는 “그야말로 디졸브된 채 일을 하는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 MBN 드라마 '리치맨' 포스터.
▲ MBN 드라마 '리치맨' 포스터.

‘리치맨’ 제작진이 촬영 소품 손상을 우려하면서 스태프 안전은 신경쓰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빛센터는 “제작진은 노동자들에게 ‘차량들이 모두 수억대 고가차량이다. 차량씬, 렉카씬에서 파손 및 미세 흠집 등에 특별히 주의해 달라’고 전달했다”며 “하지만 이 씬에서 노동자들은 안전장치 하나 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위험천만하게 일을 한다”고 전했다. 안전장치는커녕 탑승 인원, 탑승 위치에 대해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이 촬영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지난 2월 드라마제작환경 개선 TF는 드라마 제작 현장 노동자의 약 73%가 안전 문제를 겪었으며, 약 62%가 실제로 부상 당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세트장이 불안전하거나 안전 장비가 없었다는 응답자는 30%, 장비 관련 문제가 있었다는 응답자는 18%였다. 60% 이상의 노동자들은 부상으로 인한 비용 지출을 본인이 부담했다. [관련기사 : “쉼 없이 일했는데, 임금을 상품권으로”]

한빛센터는 “MBN 사측에 개선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며 “이행되지 않을 시 ‘리치맨’ 촬영 현장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빛센터는 지난 8일부터 주요 방송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며 안전한 제작 환경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앞서 드라마 ‘시크릿 마더’ 촬영 환경 문제를 지적 받은 SBS는 한빛센터의 1인 시위 이후 촬영 종료 후 휴식시간 연장, 스태프 30명 충원 등 일부 개선 조치를 내놓은 바 있다. 

한빛센터는 “이러한 조치가 실제 현장 노동자들에게 개선효과가 있는지 지켜보며 이후 대응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 고 이한빛 PD 아버지인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지난 9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고 이한빛 PD 아버지인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지난 9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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