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블랙리스트 조사위)가 이명박·박근혜 전 정부 하의 예술인 표적 검열 사건을 조사한 결과 예술인 8931명, 단체 342개가 표적 검열 명단(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중복 게재를 합산하면 등재 규모는 총 2만1362명에 이른다.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8일 오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결과 종합 발표회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조사위는 지난해 7월부터 조사 신청을 받은 사건 112건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자체 판단한 사건 32건 등 총 144건을 조사했다. 

▲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결과 종합발표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위원회 신학철 공동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결과 종합발표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위원회 신학철 공동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소설 ‘한국이 싫어서’ 검열, “자유시장경제 비판 서적 후원 못 해”

조사위는 특검·검찰이 수사하지 않은 사건을 추가로 규명했다.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2016년 초록·샘플번역지원사업 ‘심사표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출판 저작권 수출 지원 내실화를 위한 것으로, 심사위원 3인이 초록과 요약본(샘플)을 실을 책을 선정한다.

당시 배제된 서적은 ‘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김종배·조형근),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등 5권이다.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문제제기에 정부 예산을 투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2016년 초록·샘플번역지원사업 심사표 조작 내용.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2016년 초록·샘플번역지원사업 심사표 조작 내용.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사업담당자는 이 과정에서 심사표를 조작했다. 문체부는 출판진흥원으로부터 심사 결과를 보고 받고 배제 대상을 지시했고 담당자는 심사위원에게 ‘심사 결과 변경’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담당자는 이후 ‘적격’을 ‘부적격’으로 조작한 뒤 결과보고를 진행했다.

2016년 문예지 지원 기금이 절반으로 축소되기 7개월 전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학교 은사인 김아무개 한국문화비평가협회 고문은 ‘반체제잡지 창비와 그 아류인 문학동네엔 국비 지원이 필요치 않다’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김 고문은 자필 편지를 통해 “1970년대부터 반정부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었던 잡지(보기 : 반체제잡지 <창작과비평>→<창비>로 교묘히 변신)들에게는 지원을 확대하고, 한국문인협회 정통파(소위 보수 진영) 잡지들에게는 철퇴를 내린 것”이라면서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 쪽 사람들 90여 명은 그들만의 폐쇄집단을 만들어 다른 문인들을 멸시·압살하려는 저의를 품고 삽니다”라고 적었다.

▲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학교 은사인 김아무개 한국문화비평가협회 고문이 2015년 4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일부.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학교 은사인 김아무개 한국문화비평가협회 고문이 2015년 4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일부.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김 고문은 또한 “폐일언하고 한국소설가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부에 정부 지원금을 지급하고, 한국문인협회 지원금 삭감분 9백만원을 원상복구해 4천5백만원을 지급하도록 문화관광체육부장관님께 강력히 지시해 주십시오”라고 촉구했다.

김 고문의 요청은 2016년 1월 문체부 예술정책과의 문예지 지원 정책 개편안에 반영됐다. 문체부는 지원금 규모를 10억 원에서 5억 원으로 축소했고 ‘펜한국본부’를 지원 대상의 예로 적었다. 2015년 지원 대상에 들지 않았던 소위 보수 성향의 문예지 ‘PEN 문학’, ‘한국소설’, ‘한국수필’ 등이 2016년에 2천~3천만 원 규모의 지원금을 받았다.

▲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박근혜 정부 하의 문체부는 홍보물까지 검열했다. 2015년 국립극단 기획대관공연인 ‘조치원 해문이’ 홍보물엔 제작사 그린피그 및 대표 윤한솔의 이름이 삭제됐다. 윤한솔 대표는 세월호 추모 공연을 올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이다. 또다른 기획공연인 ‘망루의 햄릿’은 포스터가 광화문 광장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포스터 이미지 교체 및 온라인상 게재된 포스터 삭제 지시를 받아 조치됐다.

박근혜 청와대-국정원-문체부 삼각 공조

조사위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가동된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 들어 체계화됐고 국정원·문체부와 긴밀한 협조 체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9273개 블랙리스트 등재 명단 중 90% 이상이 박근혜 정부 때 입안·집행됐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에선 블랙리스트를 자체 생산해 청와대에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문체부에 선별 리스트를 지속적으로 통보했다. 조사위는 “문체부는 자체 검증이 여의치 않자 국정원에 인물 검증을 의뢰해 직접 리스트 작성을 맡겼다”면서 “청와대-국정원-문체부 간 삼각체제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2014년 문체부가 검증을 요청한 1400명 중 102명을 선별했다. 2015년엔 3700명 중 177명, 2016년엔 3400명 중 69명이었다.

▲ 세월호 시국선언 등 9473명 목록.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 세월호 시국선언 등 9473명 목록.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실체를 본격적으로 알린 ‘세월호 시국선언 등 9473명 목록’도 실제 활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정부 때 문체부와 청와대는 이를 전면 부인했다.

조사위는 “문체부 및 공공기관 소속 직원들이 이 명단을 각 사업 지원배제에 활용했다는 진술을 복수로 확보했으며 한 문체부 서기관은 필요할 때마다 이 명단을 문체부 각 과에 전달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및 박근혜 정부에서 작성된 정부 주도 블랙리스트 문건은 9개로 집계됐다. 문건에 활용된 시국선언 명단은 2000년 경 ‘안티조선 지식인 선언명단’에서부터 2012년 ‘정권교체를 바라는 시인·소설가 137명 시국선언’,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인’ 등 37건이 넘는다.

이 중 10회 이상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예술인 및 예술단체는 11개로 집계됐다. 이중엔 세월호 추모 공연을 올린 그린피그과 윤한솔 대표,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지목된 극단 조은컴퍼니 등이 포함됐다.

▲ 박근혜 전 정부 당시 문예계 블랙리스트 입안&middot;집행 조직도.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 박근혜 전 정부 당시 문예계 블랙리스트 입안·집행 조직도. 사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결과 종합 발표 자료집

“검·경·언론 등은 협조 안 해… 조사 못한 한계”

조사위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문체부 및 유관 소속기관에 법적·제도적 책임을 묻기로 했다. 조사위는 144건의 사실관계를 정리한 책임규명 권고안을 의결한 후 형사처벌이 불가피한 관계자에겐 수사의뢰를, 내부 징계가 요구되는 가담자에겐 징계 권고를 첨부해 전달할 것이라 밝혔다. 징계 기준은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자’다.

조사위는 또한 △헌법 및 문화기본법 개정 △국가예술위원회(가칭) 설립 △소속기관 내부 개편 등을 주요 과제로 거론했다. 법 개정은 헌법에 표현의 자유 및 문화기본권 확대를 보장하는 문구를 넣고 문화기본법에 표현의 자유 침해 범죄에 대한 처벌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국가예술위원회는 현재 문체부에 종속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상과 질적으로 다른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원재 제도개선 소위원장은 “방송통신위원회나 국가인권위원회처럼 독립적인 국가 차원 위원회를 요구하는 것”이라며 “세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 예술정책을 자율적으로 관장하는 독립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강제수사권이 없어 조사 범위가 제한됐다는 점은 한계로 남았다. 일부 사건은 검찰·경찰의 강압 수사, 언론인과 청와대 간 공조 등이 연관돼 있었지만 관계자가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조사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조사위 관계자는 “국정원, 국가기록원에 대한 정보공개 강제력이 없어 주는 만큼만 받을 수밖에 없어 큰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건, 사건이 더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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