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방송의 아버지 한스 브레도프(Hans Bredow)는 히틀러 집권 당시 방송 이념 문제로 제국방송의 사장에서 파면 당한다. 방송 민주화는 그의 신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브레도프는 공영방송 재건의 임무를 맡아 지구상 가장 민주적인 협치(Governance)구조를 가진 공영방송 이사회를 구성한다. 그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수십 명과 소수의 정치인으로 ‘방송의회’를 구성한다. 브레도프의 공헌으로 독일 공영방송 ZDF의 이사회에는 오늘날 무려 60명의 이사가 포진돼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얼마 전 정치인 비율을 더 줄이라고 판결해서 그나마 조금 줄었다.

투명성이란 이런 것이다. 정치권의 나눠먹기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협치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적어도 시장경제를 지속시키고 싶다면 말이다. 자본주의라는 ‘객관성’에 대해선 그 이후에 비로소 논의가 가능하다. 이 생존방식은 과연 인간 본성에 맞는가. 방송이 이런 철학적·사회과학적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독일 공영방송은 이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에 대한 각종 프로그램과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하는가. 협치를 통한 ‘투명성’을 확보한 독일 방송은 종전(終戰) 이후 ‘객관성’을 깊이 사유해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가능한지 객관적 근거 찾기를 줄곧 해오고 있다. 오늘날 방송 미디어가 헤겔이 말한 ‘미네르바의 올빼미’(거리두기의 지혜)라면 독일은 이미 그것을 찾았다. 우리도 그 기로에 서있다.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2018년과 1818년의 공통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공통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다는 거다. 여기 동의한다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정치, 법,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파급효과를 끼친다는 사실에도 동감한다. 돈이 있어야 정치 하고, 돈이 있어야 질 좋은 교육을 받고 문화생활도 즐긴다. 돈 벌려고 정치 하고, 재판하고, 대학 가고, 또 돈 벌기 위해 문화콘텐츠를 만든다. 이 단순해 보이는 경제와 사회구조의 함수관계를 과학으로 드러낸 이가 바로 칼 마르크스(K. Marx)다. 이 걸출한 사상가가 1818년에 태어났으니 정확히 200년 전이다.

오늘의 시장(市場)을 자본주의보다 한 발 더 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다 마르크스 덕분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시장의 실패를 미연에 방지하고 시스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인데,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구가 있다. 요즘 한창 논란중인 공영방송이 그것이다. 이 역할 때문에 공영방송은 법적으로 입지를 보장받고 있다.

그럼 이 질서 유지의 전제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관점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투명성’이다. 무엇보다 시민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이건 200여 년 전 유럽 시민계급이 절대왕정에게 요구한 정치적 항쟁의 핵심 가치다. 시민계급은 자유롭게 사업하기 위해, 자유롭게 정치하기 위해, 자유롭게 교육 받기 위해, 자유롭게 예술하기 위해 절대왕정을 몰락시켰다. 오늘 2018년 방송법 개정 논의는 시민계급의 참여라는 ‘투명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MBC 사옥과 여의도에 위치한 KBS 사옥.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MBC 사옥과 여의도에 위치한 KBS 사옥.
며칠 전 여·야 정치권은 오랜 만에 한마음이 되어 KBS·MBC 이사진 구성안에 합의하려고 했다. 여야가 합의를 시도한 안은 각 방송사 이사를 13명으로 늘려 여당 7명, 야당 6명을 추천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사 사장 임명도 이사진 3/5의 찬성으로 추천하는 방향으로 논의했다. 오랫동안 ‘관행’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며 주먹구구식으로 해오던 추천 방식을 바꾼다니 일단 반갑다. 나름 법제화 시켜서 투명성을 보이려는 노력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문제는 투명성이다. 법제화한다고 투명해질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공영방송 투명성은 독일의 브레도프에게서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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