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사원들이 최초로 함께 참가한 집회가 4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시민들의 응원 속에 열렸다. 지역 주민부터 한국항공대 학생, 대한항공 해고노동자까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시민들이 모여 ‘조양호 OUT’구호를 외쳤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라는 이름으로 모인 대한항공 직원들은 이날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를 열었다.

▲ 대한항공 직원들은 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대한항공 직원들은 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직원들 대부분은 회사 측 감시 요원들의 색출 작업에 대비해 마스크, 선글라스, 가면, 모자, 망토 등을 갖춰 얼굴을 철저히 가린 채 등장했다. 이들이 선택한 가면은 영화 ‘브이포벤데타’에서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나온 ‘가이포크스’ 가면이었다.

종로경찰서는 500여 명의 대한항공 직원 및 시민들이 집회에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전체 계단 면적의 70% 정도가 가이포크스 가면을 착용한 대한항공 직원들이었다. 2015년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 박창진 사무장은 가면을 쓰지 않고 명함과 검은색 유니폼을 착용한 채 집회 장소에 나타났다. 

시민들은 가면을 쓴 직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집회가 끝날 때까지 환호를 이어갔다. 대한항공 직원 한 명이 최초로 계단 중앙에 자리를 잡자, 주변에 서 있던 시민들은 “힘내라” “대한항공 직원 화이팅” “조양호 물러가라”라고 소리치며 박수 쳤다. 인도를 지나가던 시민들도 “국민이 응원한다”고 직원들이 모인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 대한항공 직원들은 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대한항공 직원들은 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를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첫 자유발언자는 17년 전 대한항공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다 해고된 전직 조종사 하효열 씨였다. 하씨는 “그때 노조를 잘 만들어서 조양호를 없애버렸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못해서 가면 쓰고 여기까지 나왔다”면서 “가면들이 전부 웃는 얼굴이다. 이 기운이 모여 조양호를 퇴진시키고 대한항공을 새롭게 만들 거란 희망찬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직원 가족들도 집회에 참석했다. 남편이 노조 활동으로 해고됐다 복직했다고 밝힌 정인용 씨는 “많은 직원이 대한항공 사주들의 갑질과 횡포에 얼마만큼 신음하고 힘들어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은 회사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설 때, 그들이 절대 외롭지 않게 옆에서 싸워줄 분들이 되면 정말 좋겠다”고 했다.

일부 직원은 용기를 내 얼굴과 목소리를 공개했다. 부산에서 일하는 항공우주사업본부 소속 김건우씨는 “회사에서 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침묵하지 말고 당당하자”며 발언 말미에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이를 본 박창진 전 사무장도 가면을 함께 벗었다.

▲ 집회 자리에 마련된 '조양호 일가에게 한마디' 게시판. 사진=손가영 기자
▲ 집회 자리에 마련된 '조양호 일가에게 한마디' 게시판. 사진=손가영 기자

김씨는 “조씨 일가는 정확하게는 '분노조절불가증'을 가졌다. 분노 조절을 안해도 되는 슈퍼 갑”이라면서 “이 희귀병을 고칠 사람은 바로 여기 있는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오너일가의 비리와 갑질에 직언 하지 못하는 임원을 향해 비판을 쏟아냈다. 김씨는 “자기 자리를 유지하자고, 진급을 하겠다고 (손을) 비비고 동료를 배반하고 후배를 깔아뭉개고… 자기 이익을 위해 물불 안가리는 조패밀리의 개들이 있다”며 “마름들에게 말한다. 능력으로 직장생활하자. 그리고 조용히 내려오라. 아니면 ‘양싸대기’ 들어간다”고 외쳤다. 집회 자리에선 즉시 ‘싸대기’라는 구호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익명 카톡방에서 ‘무소유’ 필명을 쓴다는 한 승무원은 음성 변조 없이 발언에 나섰다. “조현민만 휴가가냐 우리도 휴가가자!” 이 직원이 외친 구호는 이날 집회에서 가장 큰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 직원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이번에 조씨 일가를 물러나게 하지 못하면 내후년 조현민의 복수하겠단 말처럼 직원들에게 일과 노동으로 복수할거라 생각한다”며 “해외지점, 운항, 정비 모두 합심해서 함께 해달라”고 말했다.

또 다른 승무원도 발언대에 나와 “우리 대한항공 구성원 모두의 청춘을 묻어 만들어낸 곳이 바로 오늘의 대한항공”이라고 외쳤다. 그는 “온갖 굳은 날씨에도 최상의 정비를 해내고야 마는 정비사님들, 공항 카운터에서 밀려드는 승객들을 끝까지 웃음으로 참아내며 일하는 운송직원님들, 세상 구석구석으로 여객과 화물을 보내느라 애쓰는 현장 동료님들, 안전 운항을 위해 한 치의 빈틈없이 온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장님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최고의 객실승무원이라 칭찬받았던 객실 승무원들, 일년 예산을 짜고 대한항공의 목표를 설정하고 기획을 하고 사람을 선발하고 배치하고 교육하는 본사의 동료님들”이라며 사내 전 직종의 직원들을 차례로 언급했다.

▲ 한 시민이 대한항공 직원들에게 나눠준 음료수. 사진=대한항공 불법 갑질 비리 제보방 카카오톡 대화방
▲ 한 시민이 대한항공 직원들에게 나눠준 음료수. 사진=대한항공 불법 갑질 비리 제보방 카카오톡 대화방

대한항공 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참석한 여성 승무원도 “썩은 곳이 있으면 도려내야 하고 쓰레기통이 차면 버려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그 동안 방만한 경영, 폭력적 경영을 한 태도가 결국 쓰레기통 가득 차듯이 차서 버릴 때가 됐다”면서 “대한항공의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든 것은 그 경영진들이 아니냐. 이제는 정상적인 전문 경영진을 데려오는 게 우리 일”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쓰레기” 단어를 반복해서 외쳤다.

이 승무원이 발언하는 도중, 집회 질서 요원은 길 가던 시민에게 전달받았다며 직원들에게 음료수가 든 비닐봉지 두 개를 전달했다. 비닐봉지엔 “하늘을 우러러 한진 부끄럼이 없기를” 문구의 스티커가 붙여진 피로회복제 수십 개가 들어있었다.

1차 촛불집회는 2차 집회 개최를 기약하면서 저녁 8시30분쯤 끝났다. 사회를 본 박창진 사무장은 종료 전 집회를 홀로 준비한 필명 ‘관리자’ 직원의 편지를 낭독했다. 박 사무장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사람이 먼저인 회사’, 그걸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시작하고 있다”며 “단체 카카오톡방에 숨어있지만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마음 하나하나에 용기를 얻어,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라고 읊었다.

집회가 끝난 후 현장에서 마스크를 벗은 한 26년차 기장은 “촛불은 조양호가 퇴진하는 그 날까지 타올라야 한다”면서 “대한항공 전 직종이 함께 한 집회는 이번이 처음인데,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다.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참석한 시민들 중엔 20대 청년들이 많았다. 한국항공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한 26살 청년은 “나 또한 갈 수 있는 곳이라 이번 사태를 주의깊게 보고 있었다”면서 “능력도 인성도 부족한 조씨 일가가, (창업자의) 자녀라는 이유 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게 본질적 문제”라고 비판했다.

취업을 준비한다는 24살 안아무개씨도 “먼저 사회에 나간 선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중에 나도 같은 상황에서 도움을 받고 싶어서 나왔다”면서 “‘너가 아니어도 내가 부릴 사람 많다’는 태도로 직원들을 노예, 가축 취급하듯 한다. 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심 의원은 항공사 직원들의 노동권 보장을 강조했다. 그는 “항공사는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돼 노동권을 제한받는데 항공산업의 공공성 및 안전을 위해 노동권이 확실히 보장돼야 한다”며 “국회에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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