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최소 지난 9년 간 대한항공 항공기를 통해 외국에서 구매한 상품을 국내에 반입해왔다는 증언과 정황 증거가 나왔다. 화물 운반 작업은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계열사 직원들이 도맡아왔다. 내부 사정을 아는 관계자는 “제대로 된 통관 절차를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며 “최근 관련 물품 운송 지시·보고 메일을 삭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밝혔다.

한진그룹 계열사의 한 외국지점에서 일하다 근래 퇴사한 A씨와 현직 직원 B씨는 “9년 전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등이 외국에서 구매한 상품을 해당 지역 대한항공 지점장, 매니저 등이 여객기로 운반하는 것을 봐왔다”며 “일주일에 평균 2~3번 정도 물품이 운반됐다”고 밝혔다.

▲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진=대한항공 홈페이지, 연합뉴스
▲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진=대한항공 홈페이지, 연합뉴스

A씨는 이렇게 운반된 상품 박스엔 ‘나이키’, ‘아디다스’ 등 상호 이름이 적혀져있거나 ‘블루밍데일즈’ 등 외국 백화점 명칭이 적혀 있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A·B씨는 초콜렛, 과자, 고급 식기, 명품 핸드백 등이 운반되는 것도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A씨에 따르면 물품 운반엔 지역 여객지점장, 지역 공항지점 매니저 등이 관여했다. A씨는 “조현아 전 부사장, 조현민 전 전무가 온라인쇼핑 등으로 구매를 해 그걸 지점 사무실에 보낸다”며 “물품이 모이면 물류직원이 물품을 픽업해 공항지점에 운반하고 공항지점 매니저들이 물품을 받아 처리한다”고 말했다.

B씨는 “이런 물품들은 지상직원을 통해 승무원이 가지고 들어가 기내에 실려 운반된다고 들었다”면서 “박스 하나를 한 살 짜리 아기보다 소중히 다루더라”고 전했다.

A씨는 물품 수취인 란엔 조현아 전 부사장을 뜻하는 코드 ‘DDA’가 적혀있는 것을 목격했다. 사적 물품 운송은 2015년 ‘땅콩회항’ 사태를 기점으로 3~4개월 간 중단된 후 재개돼 지난 4월 초까지 계속됐다. 땅콩회항 후엔 물품 수취인이 DDA에서 한국 지점 모처에 근무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C과장’으로 바뀌었다.

물품 운송 방식은 지난 2월을 기점으로 다시 변경됐다. 한진그룹 직원들은 박스 포장 채로 운반해온 물품을 대형 및 중형 이민가방 각각에 실어 배송했다. 물류 직원이 공항에서 빈 이민가방을 받고 시내에 있는 지점에 갖다주면, 지점장이 구매 물품을 이민 가방에 싣고 2~3일 후 물류직원을 통해 다시 공항에 운반하는 방식이다.

A씨는 “대한항공 관계자로부터 ‘세관에서 하도 뭐라고 해서 바꿨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말인 즉슨 세관에서 지금까지는 봐줬다는 말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 2018년 2~4월 간 '빈 이민가방'이 한 외국 도시 공항지점에서 여객지점으로 운반된 내역. 이 이민가방엔 조양호 회장 일가가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물품이 실려 여객기에 운반됐다.
▲ 2018년 2~4월 간 '빈 이민가방'이 한 외국 도시 공항지점에서 여객지점으로 운반된 내역. 한진그룹 직원들은 이민가방에 조양호 회장 일가가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물품을 실어 여객기로 운반했다.

A씨는 관련된 증거로 지난 2~4월 간 운반한 ‘빈 이민가방’ 목록을 제시했다. 2월엔 5·13·22일 세 차례 걸쳐 빈 이민 가방이 시내 지점으로 운반됐다. 3월엔 1·5일 두 차례, 4월엔 5일 한 차례 이민 가방이 옮겨졌다.

“조현아 구매 물품 관련 메일 다 삭제하라” 지시

이와 관련된 증거 인멸이 이뤄진 정황도 포착됐다. 한 대한항공 외국 지점 직원은 지난 4월 중순 경 본사에서 파견된 운항총괄매니저(코드 KKI)로부터 조 회장 일가의 물품을 운송한 정보가 담긴 메일을 삭제하라고 지시받았다고 밝혔다. 관련 녹취록에 따르면 이 직원은 “인천의 카고(화물) 담당 직원에게 간 메일이 있을 텐데 KKI가 그거 다 지워버리라고 해 지웠다”고 말했다.

A·B씨는 지난 달 18일 개설된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 관련 사실을 최초 제보했다. A씨는 “법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데 특권층이라는 이유로 법을 무시하는 걸 비통하게 생각해왔다”며 “이 관행이 불법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10년 동안 말을 못해 양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며 제보 이유를 밝혔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지점이나 담당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확인은 어렵지만, 회사 차원에서 증거 인멸을 지시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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