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환성 독립PD 유족 박경준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가 지난달 30일 EBS 관계자 두 명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지난해 말 EBS(대표 장해랑)와 박 PD 유족 간에 위자료 문제는 손해배상 민사 조정으로 합의를 봤다. 한국독립PD협회는 유족을 대리해 박환성 PD 사망 직후부터 EBS 갑질 논란을 진상 조사하고 담당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EBS가 이를 거부하자 담당자들에게 형사책임을 묻기로 했다.

박환성 PD(전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는 ‘EBS가 간접비를 요구했다’고 폭로한 뒤 다큐프라임 ‘야수와 방주’ 촬영을 위해 김광일 독립PD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했고, 남아공에서 운전기사 없이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교통사고로 지난해 7월 사망했다.

지난달 30일 박 PD 동생 박경준 대표가 일산동부경찰서에 접수한 고소장을 보면 박 PD는 ‘야수와 방주’ 제작비가 부족한 것과 관련해 김아무개 EBS PD 제안으로 정부에 지난해 초 제작 지원을 신청했다. 박 PD는 한국전파진흥협회(RAPA)에서 제작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유아무개 EBS 콘텐츠협력제작부 소속 PD에게도 알렸다. 지난해 4월 박 PD가 RAPA에서 지원금 1억2000만 원을 받게 됐다는 사실을 EBS에 알렸다. 

그러자 최아무개 콘텐츠협력제작부 소속 PD가 박 PD에게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정부 지원금 중 40%를 EBS에 귀속시키고, 박 PD와 RAPA 간 계약서에 ‘저작권은 EBS에 양도한다’는 문구를 넣어오라고 요구했다. 이에 RAPA는 계약서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후 EBS가 박 PD에게 기존에 집행한 제작비 지출 내역을 증빙하라거나 진행 상황을 보고하라고 하거나 제출 의무도 없는 저작권·초상권·허가 등 법률 자문 내용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박 PD는 프로그램 완성도·납품 기일 준수·방송사의 영향력 등을 우려해 RAPA 지원금을 포기했다.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생전 모습.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생전 모습.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박 대표 측은 피고소인인 EBS 소속 최 PD와 유 PD가 박 PD를 어떻게 압박했는지 수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대표 법률대리인 안미연 변호사(법무법인 집현전)는 2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박 PD에게 여러 서류를 제출하라고 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행위”라며 “EBS 담당자들이 박 PD를 괴롭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PD가 남아공 출국 직전 자신의 컴퓨터에 썼던 일기를 보면 “(EBS 측으로부터) ‘제작 지원 받은 걸 혼자 다 먹으려 한 거 아니냐’란 말을 들을 땐 할 말이 꽉 막혔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EBS 압박에 박 PD가 힘들어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박 대표는 고소장에서 “피고소인들은 개인적 영달을 위해 대형 방송사 고위직 직원이라는 지위에서 계약 해지 권한, 감독 권한 및 방송사의 영향력을 남용해 정상적 업무가 불가능하도록 방해한 것 아니냐”며 “정부 제작 지원금을 포기하게 해 열악한 제작 환경을 조성해 박 PD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피고소인들이 “EBS는 RAPA와 박 PD간 협약 과정에서 박 PD가 EBS에서 제작비를 받고 제작하는 사실을 명기하지 않고 단순히 송출하는 것만으로 표기해 1인 단독 제작 지원 사업에 허위 지원한 것을 확인했다”는 등의 주장을 언론사에 유포한 것도 문제 삼았다.

박 대표는 고소장에서 “피고소인들은 자신들이 외주 제작사에 대해 부당한 요구를 해온 사실을 감추기 위해, 문제점을 지적한 박 PD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비판했다.

‘EBS-유족-시민단체’ 협상 깨져

한경수 한국독립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에 따르면 사고 직후인 지난해 7월부터 독립PD협회(유족 측), 언론개혁시민연대(중재), EBS는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 초반에는 유족 측이 요구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에 합의했지만 이후 EBS 담당자들이 교체되면서 EBS 입장이 변했다. 결국 지난해 말 협상이 깨졌다.

▲ 한국독립PD협회 등이 2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EBS의 불공정행위 진상규명을 촉구한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 한국독립PD협회 등이 2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EBS의 불공정행위 진상규명을 촉구한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박 대표는 2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때 욕설을 듣거나 폭행을 당했다면, 그래서 남아공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사고가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며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호용 독립PD협회 회장 역시 “정부가 외주 제작 전반을 즉각 조사하고 각 부처들은 EBS의 약탈적 갑질에 어떤 입장이며 근절 대책이 무엇인지 밝혀 달라”고 말했다. 김동찬 언론연대 사무처장은 “박 PD의 명예회복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손해배상 민사 조정 과정에서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유족 측에 따르면 EBS는 박 PD 위자료를 민사 조정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하며 법원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유족 측은 박 PD 사망 직후 EBS 쪽에서 ‘박 PD도 EBS 사원에 준해 보상하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어 EBS의 제안을 받았지만 정작 민사조정 절차에 돌입하자 ‘일정 금액 이상 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했다. 결국 유족 측이 제시한 금액은 검토되지 못한 채 조정이 마무리됐다.

유족 측은 EBS 담당자들 태도 때문에 고소하게 됐다는 입장이다. 안 변호사는 “유족들은 인간적 사과를 원했는데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며 “EBS 담당자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