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 PD가 빠지니 심근경색 PD가 들어왔다.”

tvN 드라마 ‘부암동 복수자들’의 PD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4회 만에 연출을 중단하자 새로운 PD가 투입됐다. 그는 이전 연출 드라마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PD였다. 김민식 MBC 드라마PD는 위의 사례를 언급하며 “그동안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벌어진 많은 비극이 노동 강도에서 비롯됐다. 연출자들이 괴물이 되는 이유였다. 그렇게 이한빛PD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말했다. 김PD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뜯어고쳐야 한다. 한 두 명의 이상주의자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 법으로 강제하는 게 맞다. 지금 법의 방향이 옳다”고 말했다.

노동절을 맞이한 언론계는 근로기준법 개정의 후폭풍에 일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3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신문·방송업은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그동안 신문·방송사는 노사 간 합의가 있을 경우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 노동시간 특례업종으로 분류돼 있었지만 오는 7월1일부터 노동시간을 주 68시간(주 40시간+연장노동 12시간+휴일노동 16시간)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

내년 7월1일부터는 노동시간이 주말 포함 주 52시간으로 제한된다. 주 40시간에 더해 휴일 포함 연장근로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사업주는 2년 이하의 징역, 2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300인 미만 언론사도 2020년 1월1일부터 같은 적용을 받는다. 이에 따라 신문·방송업계가 노동실태 조사를 비롯한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신문사의 경우 이미 ‘52시간 노동’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방송업계는 ‘52시간 노동’의 충격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일상적인 제작관행의 변화는 물론,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대형 행사가 벌어질 때의 인력규모까지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 미디어 관련 업무. ⓒ 게티이미지뱅크
▲ 미디어 관련 업무. ⓒ 게티이미지뱅크

KBS는 우선 올해 신입기자들부터 일명 ‘하리꼬미’(밤새 경찰서를 돌며 취재하고 보고하는 행위)를 없애기로 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경호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필요인력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내년에 기자만 40~50명은 뽑아야 할 것”이라고 예상한 뒤 “IMF 직후 뽑았던 기수의 임금테이블을 달리 적용한 것처럼, (내년부터) 신입 임금을 축소하는 방안으로 논의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경호 본부장은 “(방송분야를) 특례업종으로 다시 적용하거나, 시행령 등으로 유예를 하거나, 주 단위 대신 월이나 분기 단위로 조정해달라는 요구가 (내부에서)나올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KBS 사측 관계자는 “이번 주부터 유관 부서 회의를 통해 방안을 논의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상파로서는 제작비·인건비 상승요인이 발생함에 따라 종편·케이블과 다른 ‘비대칭규제’를 완화 및 수신료 인상 요구가 노사공동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연국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MBC가 그동안 살인적 장시간 노동에 기대 온 제작 관행, 경영 전략 전반이 대대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데 노사 모두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하며 “김환균 언론노조위원장이 방송3사 경영진을 다 만났다. 이 문제가 하나의 방송사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제작환경이나 편성시간 등을 두고 방송사들 간 합의가 이뤄져야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예컨대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의 경우 앞 다퉈 편성시간을 늘렸고 이에 따라 회당 제작시간이 늘어나면서 노동시간도 늘어났다. 김민식PD는 드라마의 경우 미국이나 영국 등 글로벌스탠다드에 맞춰 △회당 40분 편성 △주 1회 편성 △사전제작 강화로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변화를 위해선 MBC만 바뀌어선 안 된다. 방송사들끼리 협약을 맺어 편성 시간 합의가 필요하다.

조능희 MBC 기획편성본부장은 “각 부문별로 본부장들이 조사를 진행해 임원회의에서 보고했고 이를 취합해 노사가 같이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전한 뒤 “산별교섭으로 지상파 방송사가 합의에 이르면 종편 등 케이블과 기타 언론사에서 준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지상파3사 노조는 상급단체인 전국언론노조를 통해 방송협회와의 산별교섭을 시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언론노조는 노사창구를 단일화해 방송사 산별 교섭을 진행하는 가운데 현재 방송협회장인 양승동 KBS 사장에게 간사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한 상태다. 언론노조는 5월 중 논의를 시작해 7월 전까지 ‘52시간’과 관련한 산별 협약을 도출하는 게 목표다. 최정기 언론노조 조직부장은 “주요 방송사와 언론노조가 한 자리에서 공동 교섭을 통해 전체 방송사가 함께 지켜야 할 일반적인 원칙들을 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정기 부장은 “당장 68시간문제보다는 내년 7월 52시간 체제가 제대로 안착될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준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최 부장은 또한 “유연근무제란 이름의 편법적인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 제도를 특정 회사가 도입해선 안 된다는 기준과 원칙들을 수립하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KBS의 한 예능PD는 “현장에서는 답이 없다”고 전한 뒤 “시청자들이 잘 짜인 방송을 원하는데 결국 사람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개정안대로라면 시즌제도 못한다. 회 차에 집중해서 제작해야 하는데 다른 PD가 중간에 녹화를 이어받아서 할 수는 없다. 녹화 시간을 줄이고 방송 시간을 줄여 제작시간을 전반적으로 줄여야 하는데 그게 과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PD는 “PD들 대부분이 고위험군 환자다. 관절도 안 좋고, 녹내장에 귀가 안 들리기도 하지만 다들 이런 경우를 감수하고 제작해왔다”며 “법안 취지에 맞게 시행되면 좋긴 하지만 프로그램의 질도 중요하기 때문에 답답한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방송사 노조로서는 사측과의 협상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이 지금껏 유지해 온 제작관행과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