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약(서) 안 써주면 말아. 나 소송 걸 돈도 없고 갚아줄 돈도 없어. 나는 고아에 빈털터리고. 나는 아무 힘도 없고 김성훈(장자연 소속사 대표·본명 김종승) 사장님한테 해봤자 바위에 계란 부딪히기밖에 안 되는 거 알아. 이미 사장님은 날 죽였고 이 바닥에서 나를 발 못 붙이게 지금 조치를 다 취해놓은 상태야. 너는 모르겠지만.”

2009년 3월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인 배우 고(故) 장자연 씨가 5일 전 3월2일 자신의 로드매니저였던 김아무개 씨와 통화에서 했던 말이다.

미디어오늘은 장씨가 2009년 2월28일 ‘연예소속사에 있으면서 술 접대와 잠자리를 강요받아야 했다’는 내용이 담긴 자필 문건을 작성한 뒤 숨지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하면서 장씨가 문건 외에 세상에 남긴 목소리를 발견했다. 

▲ 지난 2009년 3월7일 신인 배우였던 장자연씨가 자신의 이름과 사인, 지장 날인이 적힌 자필 문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노컷뉴스
2009년 3월7일 신인 배우였던 장자연씨가 자신의 이름과 사인, 지장 날인이 적힌 자필 문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노컷뉴스
장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음성통화 내용 녹취록을 보면 장씨는 로드매니저 김씨와 여러 번 통화하며 본인이 소속사와 계약해지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호소했다.

장씨는 3월2일 김씨에게 “나는 가만히 있었어. 어떤 움직임도 없어. 빽도 없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에이전시 실장이) 300만 원 달라고 그랬다가 700만 원 달라고 그랬다가… ”라고 말한다. 2010년 11월12일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 사건 형사재판 1심 판결문에도 장씨가 왜 매니저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사정이 나와 있다.

장자연 “소속사 대표가 욕하는 건 기본, 때린 적도 있다”

검찰이 김종승 대표의 협박 혐의와 관련해 작성한 범죄사실에 따르면 김 대표는 2008년 11월 한 모델의 강제추행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일본으로 도주한 후 2009년 2월경 소속사 업무를 도와주던 A업체 박아무개 실장과 장씨의 전속계약 해지 문제를 상의했다.

김 대표는 박 실장을 통해 전속 계약금 300만 원을 반환하고 전속계약을 해지하자고 요구했지만 장씨는 돈이 없다면서 그대로 회사에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표는 다시 박 실장에게 계약금 300만 원과 진행비 400만 원을 포함해 700만 원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2009년 2월25일 계약 해지를 논의하기 위해 박 실장을 만난 장씨는 김 대표가 700만 원을 요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자신과 가깝게 지냈던 로드매니저 김씨에게 본인의 사정을 설명한 것이다.

수원지법 성남지원(고승일 판사)는 1심 판결문에서 “각 증거들에 의하면 김 대표는 장자연에 대해 전속계약 해지를 권유하면서도 위약금을 부당하게 부과하거나 금액을 인상하는 태도를 보였다. 김 대표가 (자신이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 받는 과정에 도망갔다는 말에) 격분해 장자연 등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듯한 언행을 보여 공포를 느끼도록 했고, 전속계약의 해지마저 순조롭지 않았다면 협박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장자연 씨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심각했다. 장씨는 당시 소속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방송 출연도 자비로 했고 그나마 유일한 연예 활동이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 출연이 종료돼 추가 수입도 없었다. 

故 장자연씨 영정이 그의 발인인 지난 2009년 3월9일 오전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故 장자연씨 영정이 그의 발인인 지난 2009년 3월9일 오전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장씨는 2009년 3월3일 김 대표의 측근 정아무개 이사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는데 정 이사가 김 대표에 대한 명예훼손 관련 언급을 하자 “명예훼손이 아니라 나는 고아”라며 “부모님이 있는 집이었으면 벌써 회사로 쫓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또 정 이사에게 “나는 사장님을 정말 존경하고, 사장님이 정말 좋았고, 정말 더 열심히 하고 싶어서 사장님이 시키는 일도 다 했다”며 “그런데 갑자기 ‘300만 원으로 해지할래’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가 갑자기 일하고 있는 차를 팔아서 밤에 짐을 회사에 다 내려놓고,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도 않지만 욕하는 건 기본이었고 나를 때린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장자연, 동료에게 “너는 아직 발톱의 때만큼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장씨가 남긴 자필 문건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장씨가 2009년 2월28일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사인, 지장 날인까지 한 문건에는 “2008년 (6월경) 김성훈 사장님이 술을 많이 드시고 저를 방 안에 가둬놓고 손과 페트병(물병)으로 머리를 수없이 때리면서 온갖 욕설로 구타를 당했다”며 “내가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촬영할 때는 진행비를 저에게 부담시켰고, 이것도 모자라 매니저 월급 및 스타일리스트비, 미용실비 모든 걸 제가 부담하게 강요해 제 자비로 충당했다”고 적혀 있다.

장씨와 함께 C엔터테인먼트에 소속돼 있었던 동료 윤아무개 씨도 법정 진술에서 ‘장자연으로부터 함께하는 손님들이 2차를 간다든지, 개인적인 만남을 갖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은 적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장자연이 따로 얘기한 적은 없고 술자리 같은 곳에 가기 싫으니까 장자연이 한숨을 쉬면서 ‘너는 아직 발톱의 때만큼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은 있다”고 답했다.

지난 1월8일 jtbc ‘뉴스룸’ 리포트 갈무리.
지난 1월8일 jtbc ‘뉴스룸’ 리포트 갈무리.
장씨가 C엔터테인먼트와 맺은 전속계약서 내용을 보면 장씨가 왜 소속사와의 계약해지를 두고 전전긍긍했는지 짐작이 간다. 장씨는 2007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C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 하면서 계약금으로 300만 원을 지급했다.

전속계약서상 장씨의 연예활동 수익금은 비용(의상비·미용비·교통비·식대 등 전체 경비) 공제 후 소속사와 5대 5로 배분하고 의상비와 개인비용은 장씨가 직접 부담해야 했다.

계약기간에 중도해약은 소속사와 장씨 간의 쌍방 합의 시에만 가능하며 소속사는 장씨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즉시 계약을 해지하고 입은 손해를 장씨에게 배상 청구할 수도 있다. 아울러 장씨가 계약상 의무사항을 위반하게 되면 위약벌금 1억 원과 소속사가 장씨를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를 장씨의 이의제기 없이 계약 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배상해야 한다. 계약 잔여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소속사에 손해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부당한 전속계약, 의무 위반하면 즉시 계약 해지와 벌금 1억 원

장씨는 자필 문건에서 ‘김 대표가 드라마 스케줄을 빼고 태국으로 와서 (드라마 감독) 술과 골프 접대를 요구했다. 그 요구를 내가 응하지 않자 차량도 내 돈으로 렌트해서 타고 다니라고 매니저에게 얘기 했다’고도 했다.

김 대표는 장씨에게 이 문건을 쓰도록 도움을 준 유아무개 소속사 전 매니저에 대한 재판 증인으로 나와 ‘장자연처럼 연 소득이 1000만 원도 안 되는 사람에게 태국으로 오라고 하면 비행기를 타고 쉽게 갈수 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내가 장자연에게 본인 돈을 내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되면 사장님 얼굴 본 지 오래됐으니까 올 수 있겠니’라고 물어본 것”이라고 항변했다.

김 대표는 “장자연이 회사에 처음 왔을 때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회사에 와서 열심히 한 결과 드라마, 영화를 해서 몇 천만 원 중에서 비용을 공제하고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전속계약의 내용으로 소속사 대표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이지 않았느냐’는 물음엔 “절대 아니라고 본다”고 부인했다.

김 대표는 “전속계약서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드라마 출연 등에 기회를 주는 것은 김 대표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기에 신인인 장자연으로서는 김 대표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변호인의 지적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씨의 동료 윤씨는 앞서 김 대표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 참고인으로 나와 ‘김 대표의 강요에 의해 술자리에 참석한 것이냐’는 물음에 “그렇다. 우리들은 김 대표가 전화하면 참석해야 한다”며 “김 대표가 전화나 문자로 어디 있으니까 바로 오라고 하면 친구를 만나거나 약속이 있어도 취소하고 갈 수밖에 없다. 김 대표가 그만큼 무서웠다”고 진술했다.

윤씨는 ‘만약 이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검사의 질문엔 “김 대표가 욕을 하든지 때리든지 할 것”이라며 “동료들이 김 대표에게 맞는 것을 봤고 2008년 추석 무렵에 아버지가 외국에서 오셔서 내가 대전에 있었는데 (김 대표가) 서울로 올라오라고 해 못 가겠다고 거절했더니 전화로 화를 냈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후 약 2개월 동안 회사에 안 나가다가 김 대표에게 600만 원을 물어주고 전속계약을 해지했다고 했다.

여성 연기자 “술자리에서 ‘놀아봐’ 조롱감이 된 느낌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9년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연예계 구조와 왜곡된 성인식 문제의 구체적인 실태 파악과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실시한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연기자의 절반 이상은 술 시중과 성 상납을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 그래프=기획사에 의한 노동권 침해 유형 및 현황.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 그래프=기획사에 의한 노동권 침해 유형 및 현황.
기획사와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경험을 묻는 설문에 응답자들은 △모든 활동에 대한 일방적 승인과 지시 △일거수일투족 감시·통제 등 과도한 사생활 침해 △홍보 활동 및 행사 무상 출연 강요 △사전 동의 없는 일방적 계약 양도 등의 경험이 많다고 답했다. 게다가 감금에 준하는 인식 구속과 같은 극단적 피해 사례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20대 초반의 연기자는 “처음에 기본적인 계약서에는 차량이나 기름값. 코디비, 밥값, 메이크업 이런 것 모두 5대 5로 나누자는 얘기가 나왔다”며 “원래 그건 회사에서 지원해 주고 그 나머지를 5대 5로 나눴는데 그렇게 되면 사실 신인 같은 경우에는 수익 배분이 9:1까지도 된다”고 말했다.

이 연기자는 “그 사람들(소속사)의 말에 따르면 요새 경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인들의 처음 책정된 출연료가 깎이지는 않았다. 재작년에 20만 원 준 걸 10만 원 주는 게 아니다. 사실 신인한텐 너무 좀 가혹하다”고 덧붙였다.

20대 후반의 한 여성 연기자가 경험한 다음의 인터뷰 내용은 일정한 계약에 묶여 있는 연예지망생이나 신인이 기획사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보여준다. 2009년 장자연의 죽음 이후 9년이 지난 이 시점, 대한민국 연예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비정규직 통계에도 집계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연예인들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다.

“나는 술을 잘 못하는데 술자리 같은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잘 못 가지만 한 번은 간 적 있어요. 어떻게 보면 원래 연예인들이니까 해야 하는 거겠지만 약간 조롱감이 된다는 느낌..‘놀아봐’ 그러니깐 그분들은 평가를 하려고 그러는 거겠지만, 노래방도 아니고 조롱의 대상도 아닌데 좀 그렇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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