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나 우파 모두 생산성을 중요한 가치로 꼽는 윤리를 설파한다. 가장 유능하고 유순한 노동자를 찾는 고용주, 여성을 복지의 대상에서 임금 노동의 주체로 이끌려는 정치인, 아이들이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성취를 가장 훌륭히 보장해 줄 가치관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부모와 교육자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케이시 윅스 듀크대 여성학 교수는 저서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에서 성별 임금 격차와 만연한 저임금, 긴 노동 시간을 합리화하는 바탕에 ‘노동 윤리’와 ‘가족 윤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자는 근면 성실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최근엔 ‘일을 기꺼이 즐기라’는 과제까지 추가됐다. 자본가가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사명감’ 등을 언급하며 노동자 태도에도 간섭한다.

남성 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할 것이란 전제와 이를 합리화하는 다양한 주장이 후자에 속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 ‘일’을 하지만 여성이 가사·돌봄 등 무급 노동을 전담하는 동안 ‘경력이 단절됐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된다.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케이시 윅스 지음/ 동녘 펴냄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케이시 윅스 지음/ 동녘 펴냄

한동안 ‘노동 윤리’와 ‘가족 윤리’에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좌우뿐 아니라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임금노동을 신성화하는 흐름이 있다. 여성이 임금노동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 한때 인기를 끌었다. 임금노동이 무급 노동의 탈출구가 된다. 이는 무급 노동 가치가 더 낮다는 인식을 대체로 받아들인다는 한계가 있다.

또 다른 페미니즘 전략은 가사·돌봄 노동 등 무급 노동 가치를 올리는 것이었다. 저자는 성별 임금 격차를 “남성이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가사 임금’을 받지만 여성은 ‘여성 임금’을 받는다”고 표현했다. 무급 노동 가치를 올리는 것이 단기 해결책일지 몰라도 기존 젠더 분업이 더 확고해진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을 상품화하거나 사회화하는 것 역시 근본 대안이 될 수 없다. 최근 많은 선진국이 가사 노동을 상품화했지만 이는 ‘인종 분업’을 초래했다. 제3세계 국가에서 선진국 가정의 가사 노동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공공 육아 시설을 완비하는 것 역시 여성의 부담을 줄일 순 있지만 현 체제를 바꾸진 못한다. 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 수가 늘어난다고 ‘가족 윤리’와 ‘노동 윤리’가 깨지진 않기 때문이다.

윅스는 노동에 대한 정통 지배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이 삶의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임금과 노동 시간이 기존 가족 제도를 근거로 설계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2차 대전 직후 하루 8시간 주 5일 풀타임 근무가 표준이 됐다. 이는 남성 노동자가 집안의 여성에게 보조를 받는다는 전제에서 나온 노동시간이다. 저자는 “남성 노동자가 무급 가사 노동을 책임져야 했다면 그가 하루 최소 8시간 일해야 한다고 확실히 요구받았을 것으로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주 40시간 모델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달라 코스따는 “우리는 매점도, 보육 시설과 세탁기, 식기세척기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권을 원하기도 한다”며 “우리가 원할 때 소수의 사람들과 사적으로 식사하는 것, 아이들과 어르신들과 아픈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언제 어디에서 할지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시간을 달라는 요구다.

미국의 사회학자 줄리엣 쇼어 역시 “젠더 분업이 없었고 역사의 그 시점에서 가정 내 재생산 노동(무급 노동)을 풀타임으로 담당하는 여성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면 이런 노동 시간제는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윅스는 주 30시간 노동과 기본소득 제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현실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임금 노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수준은 돼야 노동이 최선이라는 가치에 저항이라도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노동 시간을 줄이면 가사·돌봄 노동 시간을 확보하고 시민 간의 연대, 새로운 삶의 방법을 고민할 시간이 생긴다.

한국에서도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요구가 등장했고, 최근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노동 시간 단축이 현실화됐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노동시간 최고 수준이란 소식에 다수가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워커홀릭’을 선망한다. 현재 논쟁은 ‘주당 40시간’이 아니다. 주 40시간을 전제한 채 초과 근무를 몇 시간 허용할 것인가에 국한한다.

▲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관련 국내 언론 기사
▲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관련 국내 언론 기사

기본 소득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핀란드 정부가 예정대로 2년 한시적 기본 소득 실험을 마쳤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중간 결과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영국 일부 언론은 기본 소득 실험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석했다. 국내에선 경제 신문들이 실패를 전제한 해설 기사와 사설을 쏟아냈다. 윅스의 지적처럼 더 큰 위험은 너무 많이 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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