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은 1998년부터 ‘인간다운 21세기엔 주5일 40시간’이란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6년 뒤 법이 됐다.

2004년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금요일에 출발하는 2박3일 여행이 가능해졌다. 토요일에 만나던 친구들과 술자리는 ‘불타는 금요일’로 이동했고, 최근엔 다시 목요일 술자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주말여행과 목요일 술자리는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주 5일 40시간제를 도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직장인이 장시간노동 속에 살았다. 급기야 2018년 2월 국회가 다시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을 정했다. 14년 전에 끝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했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해방 이후 70년 조국근대화는 장시간노동이 이룬 성과다. 우리와 비슷했던 일본은 90년대 초 정부가 나서 강도 높게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폈다. 10년 뒤 일본은 OECD 평균인 1700시간대에 근접하는 노동시간 단축을 이뤄냈다. 일본 정부 산하 노동연구원 연구원에게 그렇게 빠른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쪽 팔려서 그랬다”고 했다. 세계 시장에서 경제강국 대우를 받는 일본에 장시간노동은 오명이었다.

국회가 지난 2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자 여기저기서 ‘산업현장을 모르는 소리’라거나 ‘획일적 노동시간 단축은 화근’이라고 시비를 걸어왔다. 경제지가 선두에 섰고 조선일보도 기획시리즈로 나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방향에는 공감한다고 밑자락을 깐다. 다만 “기업 규모별로, 업종별로 특성을 반영하거나 선택할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 우격다짐식, 한풀이식 제도 강행은 대가를 치른다”며 업종별 예외를 요구한다.

그 ‘예외’ 때문에 2004년에 끝낼 일을 2018년에 되풀이하는 건데. 이번에 바뀐 제도로도 예외는 여전히 5개 업종 100만 명에, 근로기준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300만 명의 노동자가 있다. 이것만 해도 전체 월급쟁이의 20%가 훌쩍 넘는다. 여기에 특수고용직 400만 명까지 합치면 여전히 셋 중 한 명은 장시간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30% 이상이면 예외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예외를 찾는 걸 보면 시장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남북,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언론은 세상모르는 소리를 한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24일자 칼럼에서 “미군이 (한국에서) 빠지고 나면 대한민국은 북한, 중국 그리고 역설적으로 일본의 놀이터가 되고, 싸움터가 되고, 거래터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미군 철수는 곧 한미 관계의 퇴행으로 갈 것이 뻔하다”고 했다. “우리가 미국의 후광 없이 중국의 무력과 종주 의식을 버텨낼 수 있는가? 일본의 재무장을 바라만 봐야 하는가? 북한의 ‘한국 잠식’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라는 대목에선 두려움이 가득하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는 그에게 미국 없는 한국은 “왼쪽에 중국, 오른쪽에 일본 그리고 북쪽에 북한이 있는 동북아의 ‘감옥’”이다.

▲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 ⓒ 연합뉴스
▲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 ⓒ 연합뉴스
“수천년을 중국의 속국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비굴하게 살았던 우리는 미국 덕에 비굴함을 벗었고 이후 70년은 이 땅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잘 살았고, 가장 자유로웠고, 민주적이었고, 가장 활기찼던 시기였다”는 그에게 미국은 든든한 뒷배다. 그러니 그가 속한 신문사는 때만 되면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 같은 행사에 헨리 키신저 같은 미치광이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다.

키신저가 누구인가. 1969년 4월 동해상에서 미 해군 전자첩보기가 북한 공군기에 격추되자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무력 보복’을 주장했다. CIA가 감청한 북한의 통신내용을 근거로 ‘고의 격추가 아닌 관제실수였다’며 말려서 겨우 무마됐다. 격추된 비행기는 한 해 전 납치된 푸에블로호처럼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했다.

당시 닉슨은 미 의회에서 핵보복을 주장했다. 반세기가 지난 일이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60년대 말 미국이 북한에 핵공격을 했으면 북한은 곧바로 군사분계선을 넘었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1969년~1973년의 1기 킬링필드는 미국이 먼저 자행했다. 미국은 60만 명~80만 명의 캄보디아 사람을 죽였다. 이 때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로 53만9129톤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미국이 2차 대전 때 일본에 쏟은 포탄의 3배다. 당시 키신저는 “베트콩들이 캄보디아를 보급선으로 삼아 준동한다”며 비밀폭격을 주도했다.

냉전으로 70년을 먹고 살았으면 인제 그만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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