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취재하는 기자는 다양한 능력을 요구받는다. 한 국가체제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정치·경제·사회·남북관계 등을 장기간 지켜보고 이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 관계자가 민감한 정보를 흘릴 때 이를 선별하고 의심해 오보를 막아야 한다.

일례로 지난 2010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아들 김정은이 중국에 후계자 승인을 받으러 동행했다는 청와대발 보도가 나왔다. 한 북한문제 연구자는 “어느 권력이 1인자와 2인자가 나라를 비우고 함께 움직이느냐”며 “사회를 의심하고 감시하려는 독재 권력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보도였다”고 비판했다.

▲ 북한 분야는 유독 오보가 많다. ⓒ istock.
▲ 북한 분야는 유독 오보가 많다. ⓒ istock.

북한 전문기자 양성의 어려움

북한 전문기자 수요는 커지고 있다. 동시에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1~2년마다 출입처를 바꾸는 인사 관행은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기자 양성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고급 취재원 확보가 어렵다는 점도 장애물이다. 북한에 접촉할 수 있는 고급 취재원은 신분이 노출돼선 안 된다.

고급 취재원을 확보하더라도 해당 기사가 인정받기 쉽지 않다. ‘대북 소식통’ ‘북한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 등 취재원을 익명으로 표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상시적이다. 비판에 대해 북한 취재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반론은 가능하나 최근 언론의 신뢰도가 추락한 상황에서 독자들이 익명 취재원 기사를 얼마나 믿어줄 지는 미지수다.

주말에 새 이슈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부 부서와 비교하면 북한 취재부서의 노동 강도는 센 편에 속한다. 북한이 주말에 미사일을 쏘기도 하고 미국 소식은 야간에 들어온다. 북한부서가 기피부서까진 아니더라도 굳이 선호할 이유도 없다. 최근 입사하는 젊은 세대는 분단·전쟁을 실감하지 않아 북한을 취재할 동기 역시 크지 않다.

▲ 1994년 사망한 김일성 북한 주석. ⓒ istock.
▲ 1994년 사망한 김일성 북한 주석. ⓒ istock.

현재 북한 전문기자로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1980~90년대 동구권과 교류가 확대되는 시기에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나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등 굵직한 사건을 취재했고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 교류를 체험했다. 북한 취재부서가 커지면서 한 부서에 오랫동안 터 잡은 기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기자 개인의 경험도 전문기자로 성장하는 요인 중 하나다. 과거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산하에서 북한을 전문적으로 보도했던 내외통신 출신은 북한 전문기자로 성장하기 유리한 경력이다. 가족이 실향민인 경우 기자들도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20년 이상 북한 취재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언론사에선 이런 어려움을 감안하고 북한 취재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해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는 “현장 기자 판단을 믿어주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방중 소식을 중앙일보 1면 단독으로 보도했는데 사내에서 아무도 이를 교차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기자는 “기사가 나오고도 조마조마한 경우가 많은데 회사가 끝까지 믿어줘야 계속 보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문희 시사IN 한반도 전문기자는 “회사가 특정한 관점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했다.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북한 기사는 언론사 정체성을 드러내는 분야인 데다 정부 대북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보도

남북대화가 시작되면 기존 북한 보도가 나아질까. 남북갈등을 다루던 기자들이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전문기자들은 조언한다. 장용훈 연합뉴스 북한 전문기자는 “아직 많은 기자들이 매파적 관점의 학자들에게 멘트를 받는데 익숙하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정상회담을 경험한 기자들이 관점을 잡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상업주의도 극복할 과제다. 남광식 연합뉴스 기자는 2000년 미디어오늘 기고 글에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봇물 터진 듯이 언론에서는 북한 소식들을 다뤘다”며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세계일보를 제외한 신문에서 북한 면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굶주리는 북한, 미사일과 핵에 집착하는 북한’이라는 기사들이었다”고 지적했다.

북한 뉴스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관련 부서가 커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라지는 현상도 반복됐다. 2000년대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역시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연합뉴스의 경우 한때 본부급으로 북한 취재 부서가 확대됐지만 2004년 일개 부서로 줄었다. 남북 정상회담 국면이었던 2000년 5월 조선일보는 이름만 남아있던 통한문제연구소 인력과 기능을 대폭 강화했고, 같은 해 11월 지면에 북한 섹션을 신설했다. 조선일보가 반공을 고집할 수 없고 대북관이 변화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반공주의에 근거한 보도가 다시 쏟아졌다.

▲ 지난 1일 평양 시민들의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1일 평양 시민들의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남북 교류가 끊기면서 북한 보도는 군사·정치 쪽에 치중됐다. 이 기간 언론이 놓친 북한 사회 변화에 대한 기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영종 기자는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배급 받고, 휴대전화가 400만대 있다는데 어떻게 개통하는지 등 북한 주민들의 일상과 관련한 기사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언론의 북한보도 역량이 드러날 전망이다. 남문희 기자는 “평창 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 등 지금까지는 극적인 측면이 있어 난이도 면에선 쉬웠지만 앞으론 복잡한 게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북뿐 아니라 주변 강대국의 각축전과 국제 정세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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