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자가 되려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함께 외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 억울한 사람이 있다고 곁에서 떠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면접장에서 이 낯부끄러운 답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면접관들이 그 말을 얼마나 믿어주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자가 됐다. 그 뒤 만난 세상에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돈도 많고 힘도 셌다. 힘이 없는 사람은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내가 처음 들었던 그 음성파일이 그랬다. 대한항공 사주 일가의 폭언과 욕설이 도를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사실 수 개월 전이다. 그때만 해도 조현민이란 이름도 낯설었다. 음성 파일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확보를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사정과 설득이 이어졌고 고심 끝에 ‘취재원’은 ‘제보자’가 되어주었다. 자세한 취재 과정을 모두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조 전무라는 팩트는 확실했다. 제보자가 가장 먼저 요구한 건 신변의 보호였다. 당연한 소리였다. 사주 일가에게 밉보였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직원들이었다.

▲ 조현민 전 대한항공 여객마케팅 전무. 사진=대한항공 제공
▲ 조현민 전 대한항공 여객마케팅 전무. 사진=대한항공 제공
기사를 본 데스크는 우려했다. 행여 조 전무가 아니면 어찌할 거냐는 걱정을 하지 않는 게 외려 이상했다. 취재 경위에 “팩트가 아니면 어떤 징계라도 받겠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습니다”라고 덧붙여 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OK GOOD". 이상하리만치 건방진 자신감을 믿어준 데스크가 고마웠다. 선·후배들은 주말에 들어온 기사와 음성파일 편집에 공을 들여 주었다. 기사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기사를 보았고, 분노의 댓글이 줄을 달았다. “직장 생활에서 어느 정도 폭언이야 감내할 수 있지 않으냐”는 생각을 하던 분들조차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항공은 짐작했던 대로 음성 파일 속 인물이 조 전무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제보자에게 조 전무의 목소리를 녹음하게 된 경위와 이번 사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흔쾌히 응했다. 사원증과 명함 일부까지 공개한 제보자 덕에 의심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대신 제보자의 신원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대한항공 직원들 사이에서 제보자가 근무한 것으로 추정한 층에서 색출 작업이 있을 거라는 등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심지어 제보자가 명예훼손 등으로 법적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기사까지 올라왔다. ‘오마이뉴스’ 내부 직원 게시판에는 전체 알림으로 이번 사안과 관련한 일체의 이야기를 외부에 삼가달라는 이병한 본부장의 글이 올라왔다. 제보자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고, 또 다른 고발을 준비하고 있는 미래 제보자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보다 내게는 이를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준 내부 구성원들이 자랑스럽고 그만큼 고마웠다.


기사가 화제가 되면서 많은 국내외 매체에서 제보자와 인터뷰 할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모두 철저한 신변 보호를 약속했고 이러한 뜻을 제보자에게도 전달했지만 별도의 인터뷰는 어렵다고 정중히 알려왔다. 제보자 인터뷰를 요청한 관계자들의 마음을 절대 모르는 게 아닌지라 매번 양해를 구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정민규 오마이뉴스 기자
▲ 정민규 오마이뉴스 기자
적고 나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비칠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운이 좋아 음성 파일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일 뿐 어떤 기자가 취재했다고 해도 내 몫 이상을 해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기레기’라는 조롱을 일상적으로 받는 기자들이지만 그래도 기자 대부분은 아직 세상의 부조리함에 맞서 함께 외쳐줄 수 있는 침묵하지 동반자라고 믿고 있어서다. 끝으로 만약 이 글을 보시는 분 중 혹시 주저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꼭 우리들의 ‘제보자’가 되어달라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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