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위기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많지만, 대부분 본질에서 상당히 벗어난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소셜미디어 같은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해서라거나 기레기 때문이라고 화살을 겨누어보지만 답이 시원치는 않다.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으니 이런 답답한 마음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저널리즘 위기의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수익 구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용자들이 미디어 콘텐츠에 돈을 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저널리즘 사업을 할 것 아니겠는가.

이 단순한 사실은 저널리즘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용자보다 광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광고는 외려 미디어의 품격을 높여주는 사실상 유일한 동거인이다. 이용자·소비자가 아니다. 고급 콘텐츠는 막대한 광고수입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광고를 부정하는 건 고급콘텐츠를 부정하는 것이다. 고급 저널리즘을 부정하는 것이다. 광고주는 돈을 지불하고 이용자는 관심을 지불한다. 결국, 미디어기업-광고주-이용자, 이렇게 커뮤니케이션 ‘참여자’ 모두에게 공정한 ‘좋은 거래가 성사되고 있다.

▲ 저널리즘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용자보다 광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 gettyimagesbank
▲ 저널리즘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용자보다 광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 gettyimagesbank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 윈-윈 시스템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다. 이것은 사실 저널리즘의 독립성에 관한 고전적인 테마인데, 광고에 종속된 저널리즘이 독자적인 공론장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다만, 이 케케묵은 논의에는 늘 하나의 역설이 빠져있다는 점이 또 문제라면 문제다. 바로, 미디어기업은 콘텐츠 판매수입이 늘어도 광고수입을 줄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역설 말이다. 저널리즘의 광고 종속성이라는 오랜 테마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지금까지 저널리즘 논의에서 광고와 미디어의 관계는 늘 양자만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이것이 논의의 과학화를 방해한다. 외려 양자는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아주 밀접히 관련시켜서 사유해야 한다. 저널리즘을 담당하는 언론기업의 기자들도 본질적으로 이러한 생산관계의 패러다임에 속해있다. 그것의 핵심은 무엇보다 언론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가상성에 있다. 이 가상이 해명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모든 저널리즘 위기 논의는 공허하다.

자 그럼 임금을 잠깐 보자. 그것은 기자 자신의 사용가치의 재생산이 아닌 교환가치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사 기자도, 언론노동자도 광고와 미디어의 양자 관계 속에서는 ‘의식 없는’ 생산자라는 점이다. 그는 편집국의 지휘 하에 노동한다.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을 의식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은 잘 개발되지 않는다. 소위 유료시스템 속에서는, 또다른 형태의 상품화 속에서는, 저널리즘의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로 대체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저널리즘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그럼, 자본주의란 또 무엇인가. 상품생산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여기 기자도 자신을 위해 생산하지 않고 자본을 위해 생산하는데, 문제는 그도 단지 “생산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그는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한다.”(K. Marx). 이제 화폐는 단순한 보편적 교환수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가상으로서 나타난다. 자본에 의한 분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은 생산자들이 의식적으로 계획한 공동행위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맹목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자들도, 언론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의식 없는 - 맹목적인 - 뉴스 상품생산자가 되겠다. 여기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현재로선, 완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최근 저널리즘 논의에서는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과 이용자에 대한 기대와 찬사가 대세를 이룬다. 이용자 세력은 무섭게 성장했다. 다만, 이용자도 대부분 임금노동자 즉, 맹목적인 상품생산자라는 점은 역시 논외(論外)다. 임금의 가상성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사실은 적극적으로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들도 일상 속에서는 의식 없는 생산자이며, 맹목적인 소비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이용자의 관심은 순백(純白)의 것인가. 언론사 기자도, 이용자도 모두 무의식적인 욕망의 주체들이다.

이 사정을 의식한다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소셜미디어 시대 위기에 빠진 저널리즘을 건져줄 힘은 기자에게 있는가, 이용자에게 있는가. 이것에 대한 과학적인 응답 속에서 발견된 진리의 토대 위에 디지털 저널리즘의 미래가 논의되고 있는가. 여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과학적 사유는 그에게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한국 저널리즘 미래담론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에 외전(外典)으로나마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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