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를 이어가려면 ‘위드유(With You)’가 필요하고, 위드유를 위해선 필요한 지식이 있다. 범죄를 범죄라고 인식하고, 피해를 당한 이후 대처할 방법·도와줄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사회 분위기를 바꿔갈 수 있다.

OtvN의 특강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위드유’ 특집으로 지난달 28일과 지난 4일 방송한 손경이 강사 편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성교육·성폭력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해온 손 강사는 “성폭력은 성이 아니라 폭력”이라며 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성범죄는 보통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 손 강사에 따르면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 비율이 92%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가해자-피해자 성별은 ‘남성-남성’, ‘여성-여성’, ‘여성-남성’ 순으로 이어진다. 권력관계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손 강사는 ‘그루밍(Grooming)’이란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성적착취 등을 목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이는 것을 뜻한다.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그루밍은 6단계를 통해 진행된다. 첫째, 피해자 고르기. 비정규직·장애인·부하·꿈이 많은 사람 등 취약한 사람이 타깃이 된다. 둘째, 신뢰를 얻는다. ‘능력이 있다’, ‘내가 뭘 줄 수 있다’ 등으로 호감을 산다. 셋째, 실제로 이를 충족시킨다. 그럴 경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넷째, 고립시키기. 둘이 각별하다고 소문을 내거나, 주변인을 차단하는 등 가해자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단계다. 다섯째, 신체접촉 등 범죄가 본격화되는 단계다. 신뢰와 의존이 바탕이 된 관계이므로 피해자는 ‘설마 저 분이’, ‘설마 지위·명예가 있는 분이’, ‘설마 배우자가 있는 분이’라며 넘어가게 된다. 마지막, 통제 단계다. ‘너도 원하는 게 있었잖아’라며 협박·회유하는 것이다.

영국에는 ‘그루밍법’이 있어 성인이 16세 이하 청소년에게 성접촉 시도만 하더라도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루밍이라는 용어조차 낯설다. 같은 사건인데도 해석이 다르게 된다. 그루밍을 통해 발생되는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게 손 강사의 주장이다.

지난달 뉴스타파 “92년생 이지연-죽음으로 남긴 미투”라는 보도는 그루밍이 얼마만큼 피해자를 처참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렸다. 산업통산자원부 산하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서 Y박사가 이지연(가명)씨를 수년간 성희롱 등으로 괴롭혔고 이씨가 지난해 9월 자신의 자취방에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 권력관계 하에서 피해자는 벗어날 수 없어서 자책하거나 가해자에게 오히려 미안해하게 된다. 사진=뉴스타파 보도 갈무리
▲ 권력관계 하에서 피해자는 벗어날 수 없어서 자책하거나 가해자에게 오히려 미안해하게 된다. 사진=뉴스타파 보도 갈무리

이 사건을 보도한 김경래 기자는 “Y박사가 이씨에게 성희롱·성추행·괴롭힘을 2년에 걸쳐 계속 진행했다. 그런데 너무 괴롭힘을 받다보니 결국은 가해자에게 죄송하다고 그래요. 용서해 달라고”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김 기자에 따르면 이씨는 그날 일기장에 “난 오늘 나의 바닥을 봤다”고 적었다. 자존감이 완전히 꺾였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는 미안해하거나 자책하게 된다. 그럴수록 가해자는 더 당당해진다. 이런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구성원들이 ‘그루밍’ 과정이 폭력의 과정이었다고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보통 성범죄는 처음 겪는 순간 범죄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범죄에 노출된 것을 알았다면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손 강사는 피해자 예방과 가해자 예방 중 단연 가해자 예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해자가 없으면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죄에 노출됐을 땐 무엇보다 증거를 수집하는 게 중요하다.

녹음은 상대의 동의가 없어도 내 목소리가 들어가면 합법이다. 예를 들어 회식 때 성희롱이 반복된다면 녹음을 켜놓고 CCTV 시야 범위 내에 앉아 기다린다. 녹음할 때는 육하원칙을 담는 게 좋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 과장님, 9시인데 호프집에서 뭐하는 겁니까. 엉덩이가 닿지 않습니까’ 등 음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손 강사는 “이 경우에도 위드유가 있다”며 “옆에서 녹음하는 사람,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증언보다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성추행이 발생했을 때 증거를 얻는 방법도 있다. 누군가 자신을 만졌다면 그 옷을 그대로 해바리기 센터(긴급전화 1336)에 가지고 가면 지문을 채취해준다. 손 강사에 따르면 해바라기 센터는 전국에 40여 곳이 있는데 여성 경찰·상담원·변호사 등이 3교대로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 손경이 강사. 사진=어쩌다 어른 갈무리

피해 직후 옷을 해바라기 센터에 가져가면 분말을 뿌려 지문을 얻어낸다. 실수로 손이 스친 정도라면 압력이 0~1 정도로 미약하게 나오지만 실제 만졌다면 압력이 더 높게 나온다. 면으로 된 옷일수록 지문 채취가 잘 된다고 한다.

또한 누가 뽀뽀를 했다면 12시간 내에 방문하면 피해자 피부에서 타액 등을 채취할 수 있다. 강제로 손을 잡을 경우 세포조직도 검출할 수 있다고 한다. 손 강사는 관련한 ‘위드유’의 사례도 하나 언급했다. 대리기사가 운전 중인데 한 상사가 후배 직원을 강제로 만지기 시작하자 차에 있는 블랙박스 방향을 돌려 뒤쪽을 찍어놓았고 수사에 협조해 피해자가 승소한 사건도 있다고 했다.

손 강사는 현재 한국사회가 사용하고 있는 몇몇 용어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몰카(몰래카메라)’는 피해의 심각성이 드러나지 않아 ‘불법촬영’으로 사용해야 한다. 실제 불법촬영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아 부산지방경찰청은 귀신이 등장하는 경고영상을 만들어 유통시키기도 했다. 여성의 성관계 여부를 남성이 판단하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처녀막’은 ‘질근육’으로, ‘폐경’은 ‘완경’으로 바꿔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다. 남자아이의 집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기도 하는 ‘자궁’을 세포를 품은 집이란 뜻의 ‘포궁’으로 변경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 외에도 손 강사는 어떻게 성교육을 할 것인지, 고정된 성역할이 우리 주변에 어떻게 퍼져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오는 11일 이어지는 ‘위드유 특집’ 방송에는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온다. 이 교수는 ‘누가 범죄를 막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범죄를 어떻게 감시하고 관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알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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