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史,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家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家 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편집자주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왜 삼성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史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년 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 미디어오늘 Beta Sit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



한국 언론은 정파적이다.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언론사주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언론을 정파주의라 한다. 미국과 서유럽도 정파주의 언론역사를 갖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기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누군가의 이익만을 위하는 정파주의를 벗어 던지고 대중적 상업주의 언론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객관주의, 전문가주의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메이크업을 통해 대중지로서 거듭났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언론 수준은 세계 저널리즘 역사 속에선 100년 정도 뒤처진 모습이다. 그래서 한국 기자들은‘기레기’라고 불린다. 민주 공화정의 주인인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특정 권력만의 입장을 보도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우위에 있을 땐 그들의 입장에서 곡학아세했다. 경제 권력이 언론을 지배할 때는 그들의 시각으로 뉴스 프레임을 만들었다.

권력에 능동적으로 순치되는 한국 언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미디어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신문은 1960년대 기업화 과정을 거쳤고, 1970년대는 대기업화 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는 독과점화 시기였다. 이때까진, 언론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이 경제적 지배력을 압도했다. 이는 언론이 정치권력의 대변인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권력의 우위는 199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1990년대부터 시장이란 허위의식 속에서 경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언론은 급속도로 자본 통제 영역으로 예속됐다. 한국 언론은 한국의 독점 자본인 재벌에 포획됐다. 사회현상이 소수의 기득권의 시각으로만 해석됐다. 이 과정에서 민주 공화국 시민들은 소외됐다. 그 결과, 한국 언론은 시민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언론이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론의 곡학아세 때문이다.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났을까?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힘의 우위는 지면과 화면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1966년 발생한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과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보도 분석을 통해 한국 언론의 정파주의 변천사를 살펴보자.

1964년 삼분폭리 사건과 삼성의 언론계 진출

박정희와 이병철은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이맹희(1993년)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 대목만 읽어보자.

“박 대통령은 아버지(이병철)를 호사스럽게 자라서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 혹은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박 대통령에 대해서 일본인이 새운 만주 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 좌익으로 잡혔을 때 동지들을 배신한 ‘신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다. 여순 반란 사건 때 동료들을 배신했고 남로당에 가입했었으며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여러 번 들었던 항간의 이야기였다 (이맹희, 1933년 167쪽).

▲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하지만 박정희와 이병철은 속내를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개발 집행자이자 그의 정치적 후원자로서 이병철이 필요했다. 이와 동시에 이병철은 그의 부를 지킬 정치적 후견인으로서 박정희 그늘이 필요했다. 이들은 서로 생존을 위해 공존하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였다. 하지만 상하 구분은 분명했다. 금융과 자원의 배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박정희가 이병철을 지배하는 관계였다.

이병철은 1960년대 초반이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신문들은 삼성을‘소비재기업’, ‘반민족기업’, ‘밀수꾼’, ‘매판자본’으로 지칭했다. 이 호칭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 4월19일 혁명과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거치면서 그는 대한민국 부정축재 처벌 1순위였다.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과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가장 많은 벌금을 내야했고 그의 사금고나 마찬가지였던 3개의 시중 은행도 몰수당했다 (김주환, 2004년 428쪽). 이런 와중에 3분 (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미국이 원조물자 공급을 줄여 국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삼성이 시장 가격 담합을 유도해 폭리를 취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반만 진실이었다. 나머지 반은 박정희와 연관된 것이다. 공화당이 정치자금 상납을 조건으로 이병철 등 소수의 기업인들에게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 산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문명자, 1999년 213쪽). 실제로, 그 당시 밀가루와 설탕, 시멘트 등 분말제품의 시중가격이 200~300%까지 폭등했다. 하지만 삼분폭리 사건에선 박정희 이름은 거명도 되지 않았다.

1964년 터진 이른바 삼분폭리사건을 겪으면서 이병철은 중앙 매스컴 설립을 서둘렀다. 그렇게 탄생한 언론사가 동양방송국과 중앙일보이다(서현진, 2003년). 이들 삼성 언론사들의 역할은 모기업 보호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들은 삼성 그룹에 관련된 비방 기사를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삼성 계열사의 각종 부정과 문의 사항을 해결했다. 또한 언론견제 및 재계 경쟁자 견제(예 삼양사-동아일보)역할 그리고 계열사의 민원을 해결하고 신규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주환, 2004년/이시가와, 1988년). 한마디로 삼성의 언론사들은 민주 공화국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사주와 모기업 이익에 충실한 정파주의 언론사였다.

박정희와 이병철의 조직적 결탁 :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1966년 9월15일 경향신문은 ‘또 재벌 밀수’ 제목으로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경향신문이 처음 보도한 것이 아니었다. ‘표1’에서 보듯, 당시 부산에 있는 경남일보가 첫 보도를 했다. 하지만 삼성의 로비로 인해 전국적인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를 경향신문이 4개월 뒤에 보도하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또한 사건 축소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정희가 재수사를 지시했다. 이로 인해 관련 공무원들이 구속됐고, 삼성오너 일가인 이병철의 아들 이창희씨도 구속됐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삼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 표1) 사카린 밀수사건 보도 일지
▲ 표1) 사카린 밀수사건 보도 일지

▲ 1966년 9월15일 경향신문은 ‘또 재벌 밀수’ 제목으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 1966년 9월15일 경향신문은 ‘또 재벌 밀수’ 제목으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특히 삼성 사카린 밀수 보도는 재벌이 방송국을 소유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여실히 드러냈다. 삼성 계열사였던 동양방송이 편파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불법행위를 비호하는 방송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TBC-TV는 1966년 9월18일 오전 9시30분 방영된 ‘일요 응접실’에서 “한 회사의 직원이 저지른 비행을 회사전체에까지 확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옮지 않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에서 신문이 과장 보도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나치면 특정 재벌에 대한 증오감을 조장시키며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강현두·이창현, 1987년 17쪽). 같은날 TBC 라디오 오후 10시30분에 방송된 ‘주간특집’에선“삼성재벌 전체가 마치 죄인인 것 같이 취급하는데 물론 범죄행위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만 또 이것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과장해서 전전하는 것도 안 좋지 않으냐? 오천만 달러를 투자해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회사에서 불과 2만 달러의 밀수를 해가지고 법에 걸리고…불명예를 뒤집어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강현두·이창현, 1987년 18쪽). 또한 중앙일보도 삼성 사카린 사건을 축소 보도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을 회사의 직원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는데 앞장섰다. 1966년 9월22일 중앙일보는 이병철의 사퇴 주장을 1면에 실은 뒤 한 번도 한비사건을 1면 머릿기사에 배치하지 않았다(서현진, 2003년).

▲ 1966년 9월16일 중앙일보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 1966년 9월16일 중앙일보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삼성은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국회의원 낙선운동도 전개했다. 이맹희(1993년)의 회고록을 살펴보자. “모두 5명을 대상으로 낙선 운동을 했는데 그 중 4명은 원했던 대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한 명은 당선되었다 …중략… 당시 대구에서 출마한 이만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나는 제일모직 임원들에게 특별 지시를 하고 대구로 파견한 중앙일보 기자들에게는 취재비를 1백만 원 더 주는 등 갖가지 조치를 다 취했다. 대구에는 삼성의 큰 공장들이 있었고, 또 삼성이 처음 기업을 만든 고향 같은 곳이어서 대구에서만은 우리가 반대했던 국회의원은 절대 당선시키지 말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180~181쪽).

이처럼 삼성 오너 일가는 신문과 방송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홍보지로 적극 활용했다. 여기에 보도를 통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언론을 사유화했다. 사회적 여론이 들끓었다. 심지어 박정희가 재벌 언론 소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그 내용은 “삼성 재벌의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의 경우 밀수 행위가 분명하고 방법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산한 언론기관을 동원하여 불법과 부정을 비호하는데 급급한 인상을 준다. 사회 공기인 언론의 기본 사명을 저버리고 이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볼 수 밖에 없고 어느 특정인이 언론을 독점 사물(私物)시 하는데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해 제도상의 규제가 필요하지 않은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법 테두리 안에서 재벌과 언론기관을 완전 분리할 수 있도록 규제할 수 없는가, 특정인이 여러 개의 언론을 독점, 소유, 경영할 수 없는가를 법무부 장관, 공보부 장관, 법제처장에게 연구하도록 지시했다”고 1966년 9월21일 발표했다.

이는 마치 박정희가 이병철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도덕적 우위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 그리고 대한민국 관료들이 공모한 전형적인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사건 내면을 들여다보면 박정희의 위선과 이병철의 탐욕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 1975년 5월2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 1975년 5월2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자세한 내용은 조갑제(2000년) 글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삼성이 한비 건설을 위해 일본 미쓰이 그룹으로부터 빌리기로 한 42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리기로 했다. 그 차관은 현금이 아닌 기계와 설비를 한비 측이 구매하는 형식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재벌 미쓰이는 관례대로 삼성 측에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 현금을 들여오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병철은 박정희와 상의한 다음 리베이트 100만 달러어치 물품을 밀수하기로 했다. 정치자금 문제, 한비 건설 자금의 부족분 보충, 그리고 울산공단 건설용 기계류를 들여오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삼성이 박정희 정권 측과의 합의하에 리베이트 100만 달러어치의 물건을 밀수하여 암시장에 내다 팔고 그중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나머지는 한비 건설에 내자로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갑제, 2000년 150쪽). 정부와 협의한 밀수 물품은 양변기·냉장고·에어컨·소화기·스테인리스판 등이었다. 외국에선 한화로 3만 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를 한국 암시장에 내다팔면 10만 원 정도였다. 정부와 협의하지 않은 밀수품은 삼성 계열 공장 건설에 필요한 건설용 기계류, 정밀저울 그리고 두꺼운 강판을 굽힐 수 있는 기계류 등 이었다 (조갑제, 2000년 153~154쪽).

다시 말하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 그리고 대한민국 관료들이 결탁해서 벌인 범죄행위였다. 이에 대해 삼성 소유 언론사들은 사주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중앙일보와 TBC의 보도행태를 비난하면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서는 계기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 언론이 정치와 경제 권력에 순치되면서 상업화의 길을 걸었음을 의미한다.

관례화된 정경유착 : 2005년 ‘삼성 X-파일’

1988년 5월 월간지 ‘신동아’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인터뷰 내용을 ‘이병철 삼성의 이미지 바꾸겠다’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기자 = 요즘 화제가 되는 새마을성금이나 일해재단 등에의 출연으로 고통을 받은 일은 없습니까.

이건희 = 그것도 사회발전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공공단체나 기업이 자진해서, 그러니까 기업의 경우 사회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그런 활동을 지원하고 나섰더라면 문제가 안됐을 수 있지요.

기자 = 혹시 선친의 유언 가운데 한비와 동양방송(TBC) 복귀 문제가 없었습니까.

이건희 = 유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입장에서 언젠가 삼성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경제력으로 세계 굴지의 비료공장을, 그것도 얻기 어려운 차관을 끌어다 지어놓고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렸다는 게 애석하지요.

기자 = TBC는 어떻습니까?

이건희 = KBS에 통폐합된 것은 당시 정부 시책이었고 삼성은 거기에 협력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선친의 심혈이 맺힌 결정체였고 또 단장의 심정으로 내놓아야 했던 만큼 어찌 미련이 없겠습니까. (민병문, 1988년 428쪽).

인터뷰 답변을 통해 두가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하나는 삼성 이씨 일가는 정치권력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 느슨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환원이란 용어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비료와 TBC에 대한 강한 애착을 읽을 수 있다. 이 회장의 바람은 실제로 모두 이뤄졌다. 1994년 한국비료는 민영화돼 삼성정밀화학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2015년 롯데그룹에 이를 매각하면서 애증의 한국비료는 삼성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삼성은 2010년 지상파 방송국처럼 보도와 예능 그리고 드라마까지 방영할 수 있는 방송국 허가를 받았다. 그 이름이 JTBC다. 추론컨대 이 이름은 TBC와 중앙일보의 J 영어 첫 자를 합친 글자로 보인다. 이는 삼성과 중앙일보가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JTBC란 브랜드명은 한편으론 중앙일보와 삼성이 형식적으로 분리돼 있지만 실제론 하나의 재벌일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한다. 실제 김용철(2010년)은 홍석현 회장의 중앙일보 지분은 이건희 회장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주 명의자는 홍석현이지만 의결권은 이건희 회장이 행사한다는 비밀 계약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계약서는 삼성만 갖고 있다고 서술했다(192쪽). 또한 김용철 변호사는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93쪽)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중앙일보는 삼성에 돈으로 종속돼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11월26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비자금 관련 문건을 공개하며 관련 내용을 폭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11월26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비자금 관련 문건을 공개하며 관련 내용을 폭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김용철의 주장은 2005년 삼성 X-파일이 보도 되면서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표2’에서 보듯, 삼성 제국의 통제실인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1997년 대통령 선거 관련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은 △삼성, 100억 원대 대선 자금 전달 △삼성, 정기적으로 검찰 간부 뇌물 제공 △삼성, 국회에 자신들의 프락치 보냄 △삼성, 기아차 은행 대출금 수천억 일시 상환토록 정치권 로비 정황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이상호, 2010년 10쪽). 하지만 이같은 삼성 X-파일의 내용은 보도 되지 못했다. 1966년 삼성 사카린 사건은 간헐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그해에 보도했지만, 2005년 삼성 정경유착 보도는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진실을 밝힌 기자와 국회의원만 처벌을 받았다. 삼성 돈이 사회정의를 처벌한 것이다.

▲ 표2) 삼성 X-파일 주요 일지
▲ 표2) 삼성 X-파일 주요 일지
▲ 2005년 7월21일 조선일보는 ‘안기부, YS정부 때 비밀조직 운용 政·財·言 인사들 대화 不法도청’ 제목으로 삼성 X-파일 관련 첫 보도를 했다. 사진=필자 제공
▲ 2005년 7월21일 조선일보는 ‘안기부, YS정부 때 비밀조직 운용 政·財·言 인사들 대화 不法도청’ 제목으로 삼성 X-파일 관련 첫 보도를 했다. 사진=필자 제공
심지어 이상호 기자는 삼성의 정경유착 비리를 취재한 뒤에도 약 10개월 정도 보도를 할 수 없었다. 그가 속했던 문화방송(MBC)의 내부 구성원들의 방해와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삼성이 문화방송의 최대 광고주였기 때문이었다. 삼성의 돈이 신속성과 정확성이 생명인 언론 보도를 10개월이나 붙잡고 있었다.

실제로 삼성 돈의 영향력은 언론사의 뉴스 프레임에 그대로 반영됐는데 ‘표3’에서 보듯, 언론 지배구조에 따라 보도 프레임을 다르게 보도했다.

▲ 표3) 삼성 X-파일 언론사별 보도 프레임
▲ 표3) 삼성 X-파일 언론사별 보도 프레임
김광원(2008년)이 2005년 7월21일부터 8월20일까지 보도된 스트레이트와 기획기사, 해설기사와 분석기사, 사설 컬럼을 분석한 결과 중 일부만 살펴보자.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를 특종 보도했던 경향신문은 그동안 소유구조가 종교단체→재벌→사원지주제로 변했다. 삼성 X-파일을 보도할 당시 소유구조는 사원지주제였다. 이 신문이 선호한 뉴스 프레임은 제도 정비에 주안점을 뒀다. 보도 프레임도 조선일보에 비해 적었고 정경유착 보도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삼성과 적대적 관계를 맺었던 동아일보는 특이하게 2005년 정경유착 보도 프레임이 하나도 없다. 이는 동아일보 사주와 삼성가의 이건희 가문이 사돈관계를 맺은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오너의 특수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권력의 무능을 부각하는 불법도청 프레임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특히, 삼성 X-파일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연루된 중앙일보는 동아일보처럼 불법 도청 프레임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 2005년년 7월22일 중앙일보의 삼성 X-파일 첫 보도. 사진=필자 제공
▲ 2005년년 7월22일 중앙일보의 삼성 X-파일 첫 보도. 사진=필자 제공
즉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은 한국 언론이 자본의 정파주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삼성이 돈으로 한국 사회를 유린하는 2000년판‘정경유착’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쫒기보단, 언론사의 생존적 현실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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